봄날은간다

계시록

시월의숲 2025. 5. 24. 15:53

 
 
"서로 연결성, 연관성이 없는 정보들 사이에서 일정한 규칙이나 패턴, 의미를 찾는 거죠. 그냥 자연현상인데 특징적인 무언가 보인다고 믿는 거죠. 이런 사람들은 배가 떨어지면 기어이 까마귀를 만들어냅니다."(연상호 감독, 《계시록》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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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라는 말은 매력적이다. 그 말은 지리멸렬한 내게도 무언가가 특별한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기대감을 불러일으킨다. 나도 가끔 계시라는 말을 쓴다. 쉽게 일어날 것 같지 않는 일이 우연하게도 연이어 발생했을 때, 혹은 스치듯 생각했던 것들이 갑자기 내 앞에 현실로 나타났을 때, 이것은 계시가 아닐까?라는 말을 쓰게 되는 것이다. 계시라는 말에는 위계가 있고, 설명할 순 없지만 어떤 영적인 존재의 특별한 힘이 느껴지는 것 같고, 그리하여 기대감이나 영감 등으로 한순간이나마 충만해지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꼭 종교적인 것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연상호 감독의 《계시록》을 보고 나면 '계시'란 정말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믿고 싶은 사람의 마음이 있을 뿐이란 걸 새삼 깨닫는다. 정말로 신의 말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해석하는 것은 언제나 인간이 아닌가. 믿음은 설명의 영역이 아니다. 믿음이 깊을수록 그것을 객관적으로 설명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믿는다. 그리고 때론 그것이 유일한 진리인 양 강요한다. 세상에는 객관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분명 존재하며, 그런 존재에 대한 자신의 믿음만이 옳다고 믿는 사람들 또한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믿음이란 의심을 바탕으로 했을 때 굳건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닐까(어쩌면 이건 그냥 상식적인 말일지도). 맹목적인 믿음, 비뚤어진 믿음, 자기변명의 믿음은 영화 속 목사처럼 파멸을 자초할 뿐인 것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좀 답답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럭저럭 볼만했다. 이야기의 구조가 도식적이고, 때론 신파적이며, 예측 가능하거나 단순하다 느껴지기도 했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나름 빠져드는 감정의 흐름이 있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형사(신현빈)가 자신의 트라우마를 치유해가는 이야기보다도, 스스로 느낀 '계시'로 인해 점차 이기적이고 자기 방어적인 광기로 치닫게 되는 목사(류준열)의 이야기가 더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이것이 무엇으로 보이는가? 이것은 나를 이 고통과 죄의 나락에서 구원해 줄 신의 계시가 아닌가! 하나님 아버지! 나를 인도해 주소서! 나를 이 끝없는 고통의 구렁텅이에서 구해주소서! 내 죄를 사하여 주소서! 이 얼마나 달콤한 유혹인가! 내 죄를 사하여 줄 존재가 있다는 것은! 나를 이 고통에서 건져내 줄 누군가 있다는 것은! 인간은 나약하고 나약하다. 신은, 악마는, 그게 무엇이든, 인간의 나약한 부분을 찢고 파고들어 거기 서식한다. 어떻게 하면 좋은가, 인간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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