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조세희,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이성과 힘, 2000.

시월의숲 2025. 8. 30. 15:02

자세히 보면 지금도 같은 일이 되풀이되지만, 그때 제일 참을 수 없었던 것은 '악'이 내놓고 '선'을 가장하는 것이었다. 악이 자선이 되고 희망이 되고 진실이 되고, 또 정의가 되었다. 내가 개인적으로 선택의 중요성을 느끼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어느 날 나는 경제적 핍박자들이 몰려 사는 재개발 지역 동네에 가 철거반―집이 헐리면 당장 거리에 나앉아야 되는 세입자 가족들과 내가 그 집에서의 마지막 식사를 하고 있는데, 그들은 철퇴로 대문과 시멘트담을 쳐부수며 들어왔다―과 싸우고 돌아오다 작은 노트 한 권을 사 주머니에 넣었다. '난장이 연작'은 그 노트에 씌어지기 시작했다.(9쪽, 작가의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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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이 필요할 때 우리는 혁명을 겪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는 자라지 못하고 있다. 세삼세계의 많은 나라들이 경험한 그대로, 우리 땅에서도 혁명은 구체제의 작은 후퇴, 그리고 조그마한 개선들에 의해 저지되었다. 우리는 그것의 목격자이다.(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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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아이는 함께 똑같은 굴뚝을 청소했다. 따라서 한 아이의 얼굴이 깨끗한데 다른 한 아이의 얼굴을 더럽다는 일은 있을 수가 없다.(15쪽, '뫼비우스의 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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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지식은 터무니없이 간사한 역할을 맡을 때가 많다. 제군은 이제 대학에 가 더 많은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제군은 결코 제군의 지식이 제군의 입을 이익에 맞추어 쓰여지는 일이 없도록 하라.(29쪽, '뫼비우스의 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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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달에 세워질 천문대에서 일할 사람은 행복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에게 달은 황금색의 별세계였다. 그는 지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너무나 끔찍하다고 했다. 그의 책에 의하면 지상에서는 시간을 터무니없이 낭비하고, 약속과 맹세는 깨어지고, 기도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눈물도 보람없이 흘려야 하고, 마음은 억눌리고 희망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제일 끔찍한 일은 갖고 있는 생각 때문에 고통을 받는 일이다.(67쪽, '우주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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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도도새에 대해 들어본 적 있니? 그 새는 날개를 사용하지 않았다구. 그래서 퇴화했어. 나중에 날을 수가 없게 되어 멸종당했어. 나는 그 도도새야. 불쌍하지만 너도 그래. 우린 중요한 것만 골라 배반하는 쓰레기들 속에서 살고 있어."(73쪽, '우주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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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사랑이 없는 욕망만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단 한 사람도 남을 위해 눈물을 흘릴 줄 모릅니다. 이런 사람들만 사는 땅은 죽은 땅입니다."(102쪽,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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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이란 무엇인가? 총탄이나 경찰 곤봉이나 주먹만이 폭력이 아니다. 우리의 도시 한 귀퉁이에서 젖먹이 아이들이 굶주리는 것을 내버려두는 것도 폭력이다. 반대 의견을 가진 사람이 없는 나라는 재난의 나라이다. 누가 감히 폭력에 의해 질서를 세우려는가?(110쪽,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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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햇살 속에서 꿈을 꾸었다. 영희가 팬지꽃 두 송이를 공장 폐수 속에 던져넣고 있었다.(126쪽,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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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를 난장이라고 부르는 악당은 죽여버려."

"그래. 죽여버릴께."

"꼭 죽여."

"그래. 꼭."

"꼭."

(144쪽,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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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에게 이 사회는 괴물덩어리였다. 그것도 무서운 힘을 마음대로 휘두르는 괴물덩어리였다. 동생과 동생의 친구는 저희 스스로를 물 위에 떠 있는 기름으로 보았다. 기름은 물에 섞이지 않는다. 그러니 이러한 비유도 합당한 것은 못 된다. 정말 무서운 것은 두 사람이 인정하든 안 하든 하나의 큰 덩어리에 묻혀 굴러간다는 사실이었다.(146쪽, '육교 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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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의 칠월과 팔월은 유난히 무더웠다. 삼십 년 만의 더위라는 기사가 신문을 덮고는 했다. 나라 전체가 바싹 말라 타버릴 것 같았다.(180쪽, '기계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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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병에서는 안이 곧 밖이고 밖이 곧 안입니다. 안팎이 없기 때문에 내부를 막았다고 할 수 없고, 여기서는 갇힌다는 게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벽만 따라가면 밖으로 나갈 수 있죠. 따라서 이 세계에서는 갇혔다는 그 자체가 착각예요."(262쪽, '클라인씨의 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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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 수도 없나요?"

쉰 목소리로 한 여공이 물었다.

"운다고 누가 뭐랍니까. 소리내 울지 말라는 거죠. 극장 구경을 온 것도 아니고, 울고불고하면 서로 곤란해요."

"극장 구경이나 가 울 사람은 여기 없어요."

"그럼 늘 울어요?"

"그래요. 분해서 날마다 울어요."

(283쪽, '내 그물로 오는 가시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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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속에서 그물을 쳤다. 나는 물안경을 쓰고 물 속으로 들어가 내 그물로 오는 살찐 고기들이 그물코에 걸리는 것을 보려고 했다. 한 떼의 고기들이 내 그물을 향해 왔다. 그러나 그것은 살찐 고기들이 아니었다. 앙상한 뼈와 가시에 두 눈과 가슴지느러미만 단 큰가시고기들이었다. 수백 수천 마리의 큰가시고기들이 뼈와 가시 소리를 내며 와 내 그물에 걸렸다. 나는 무서웠다.(302쪽, '내 그물로 오는 가시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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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 하늘이 환해지며 불꽃이 하늘로 치솟으면 내가 우주인가 함께 혹성으로 떠난 것으로 믿어달라. 긴 설명은 있을 수가 없다. 내가 아직 알 수 없는 것은 떠나는 순간에 무엇을 대하게 될까 하는 것뿐이다. 무엇일까? 공동묘지와 같은 침묵일까? 아닐까? 외치는 것은 언제나 죽은 사람들뿐인가? 시간이 다 되었다. 지구에 살든, 혹성에 살든, 우리의 정신은 언제나 자유이다.(318쪽, '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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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꿈과 상상의 이룰 수 없는 아름다움 때문에 현실의 어두움과 아픔을 더욱 격렬하게 느낄 수 있다. 조세희의 동화적 발상과 비사실적인 문체는 그래서 사실 세계의 억압된 불행을 보다 사실적으로 드러내보여주며 사회적 실감을 주관적 공감으로 실체화·내면화시키면서 초월적 승화를 유도하는 것이다.(330~331쪽, 김병익 해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