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버지를 난장이라고 부르는 악당은 죽여버려."
"그래. 죽여버릴께."
"꼭 죽여."
"그래. 꼭."
"꼭."
(144쪽,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이상하지. 너무나 유명한 소설이라면, 그것을 읽은 후에는 아무런 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어쩌면 읽는 내내 모든 것들이 납득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소설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그것이 오래도록 회자되며 읽히는 책들의 속성일지도 모른다.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역시 그러했다. 나는 오래전에 이 소설을 한 번 읽었으나 다시 읽은 지금도 나는 이 소설에 대해서 어떤 말도 할 수 없음을 느낀다. 하지만 그것에 대해 내가 무력감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나는 오히려 그것을 어떤 완벽함(?)의 척도로 받아들인다. 아무것도 말할 수 없게 만드는 책이라는 것. 그저 고개를 끄덕이거나, 분개하거나, 고통에 휩싸이거나 슬픔의 눈물을 흘리는 것 외에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음을 깨닫는 것. 그것은 어떤 책이 지닌 완벽함의 정도가 아닐까? 물론 그 완벽함의 정도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그리고 사실 나는 이 책이 완벽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완벽한 책이 있을까?) 하지만 이 책이 지닌 어떤 면은 충분히 완벽하다 할 수 있을지 모른다. 불의에 대한 분노의 표출이라는 면에서. 그것이 극단적인 울분과 저항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에서. 이것은 마치 날카로운 송곳과도 같다. 나는 이 소설을 읽는 내내 날카로운 송곳으로 찔리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죽음과 폭력, 절멸만이 이 불의와 폭력, 환멸에서 벗어나는 길임을 말하고 있는 것 같아서 고통스러웠다. 체념과 비관적 전망이 소설 전체를 아우르고 있는 것 같아서 슬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강력하다. 강력한 호소가 있다. 악이 대놓고 선을 가장하는 불합리한 현실에의 격렬한 저항이 있다. 그리고 그것을 타파하고자 하는 혼신의 몸부림이 있다. 그것이 이 소설을 지금껏 살아있게 했으며, 앞으로도 살아있게 할 것이다. 왜냐하면 '악'은 매번 교묘히 그 모습을 바꾸어 앞으로도 계속 존재할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면 이 책 또한 영원히 뾰족한 송곳으로, 공장 폐수 속에 던져넣은 팬지꽃으로, 난장이의 모습으로 계속 존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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