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렇게 조용히 남아 있는 것들, 삶과 죽음이 중요하지 않은 것들, 격정의 폭풍을 경건함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들, 나를 키워온 것들, 내가 열에 들떠 찾아 헤매기도 했으며 그것을 찾아 먼 길을 떠나려고 짐을 싸기도 여러 번이었으나 문득 둘러보면 언제나 그 자리에 있어왔던 것들, 오직 쓰는 자들과 읽는 자들만을 위해서, 언어의 영웅들, 그들의 언어만으로 존재하는 저 엘리시움의 세상을.(배수아, 『독학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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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수아의 『독학자』를 다시 읽고, 처음 읽었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다른 소설들이 떠올랐다. 그것은 당연하게도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보다 더 많은 책들을 읽었기 때문일 것이다(새삼 같은 책을 여러 번 읽는 일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소설 속 주인공과 그의 대학교 친구인 S와의 이야기를 읽을 때면 헤르만 헤세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가, 소설 전반에 넘쳐흐르는 독설가적이고 반항적인 면모는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옛 거장들』이, 자유롭고 독립적인 정신을 추구하는 주인공의 태도에서는 얼핏 셀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이 떠오르기도 했다. 물론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것은 나만의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일 뿐이니까. 나는 다만 내가 언급한 그 소설들에서 느껴지는 어떤 분위기가 『독학자』의 주인공 혹은 그가 추구하는 타협하지 않는 정신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고 느꼈다.
하지만 정작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이 소설의 주인공을 '서기 250년에 이집트에서 태어나 이십 세에 가진 재산을 모두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빈손으로 신과의 절대적 교감을 위해 뜨겁고 황량한 사막 한가운데를 향해 홀로 걸어 들어간 최초의 사막 은둔수사 성 안토니우스에 관한 글을 읽게 된 경험이 작용'했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그가 애정을 기울여 쓰고 자 했던 것은 '섬세한 영혼을 가진 한 고독한 젊은이의 내면세계'였다고도 말한다.
작가의 다른 소설들에서도 그런 특징들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유독 이 소설에서는 주인공의 비타협적이고 독설가적인 면모가 여실히 드러난다.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소설이 떠오른 이유도 바로 그러한 특징 때문이었다. 그의 독설(이라고만 표현하기에는 너무 편협한 것이 아닌가 걱정도 되지만)은 자신이 상상하던 자유로운 정신의 표상이었던 대학이, 자신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곳이었음을 깨닫는 순간부터 더욱 신랄해진다. 그곳은 쓰디쓴 실망만을 맛본 패배의 장소가 되고, 급기야 그는 대학을 떠나게 되며, 대학을 떠나 홀로 새로운 도시에서 최소한의 생계를 이어주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마흔 살까지는 오로지 읽고 쓰는 일만 하겠다는 선언을 하기에 이른다.
나는 이 소설을 읽고 주인공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가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증오하는지, 그리고 무엇을 추구하고자 하는지. 처음 읽을 때는 단순히 주인공의 신랄한 언어와 비타협적인 태도, 단호한 결단에 매혹되었다면, 다시 읽은 지금은 그가 두려워하는 것을 나 역시 두려워하고 있다는 동질감에 더욱 주목하게 되었다. 그때는 차마 느끼지 못했던 것들을 지금의 나는 느끼고 있다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는 없지만.
나는 후회하지 않고 뒤돌아보지도 않는다. 그리하여 내가 떠나온 세계의 사람들은 아무도 나를 다시 볼 수 없으리라.(133쪽)
자신이 만든, 억지로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영혼을 깊숙이 빨아들이는 백색의 대학으로, 책으로부터 새로운 이름을 부여받은 그가 걸어간다. 독학자로 거듭난 주인공의 저 담담하지만 단호한 선언에 나는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나 역시 바라마지 않던 도시로의 진입임과 동시에 새로운 이름으로 태어나고 싶은 내 열망과도 같았으므로. 그렇게 선명한 독학자가 되기를 나 역시 간절히 바라고 있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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