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젠가 나는 배수아의 소설을 읽고 그렇게 써 본 적이 있다. 그러니까 작가 자신이 쓴 책의 문장으로 내 감상문을 쓰는 것. 그의 문장이 내 말을 대신하게 하는 것. 그리하여 다시 그것을 읽는 것. 마치 처음 읽는 것처럼. 마치 바람이 대신 말하게 하는 것처럼. 나는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야생의 심장 가까이』를 읽고 나서도 그때와 같은 충동을 느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계속해서 기다리기만 하면, 늘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은 후의 시간 한 줌 속에 있게 되는 거야, 알겠어?(13쪽)
이 책의 주인공인 주아나는 기다리지만은 않는다.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은 후의 시간 한 줌 속에 있지 않기 위해서.
그녀와 사물들 사이엔 무언가가 있었지만, 그 무언가를 파리처럼 잡고서 살짝 훔쳐보면―아무것도 도망치지 못하게 조심했는데도 ―눈에 보이는 건 자신의 장밋빛 손, 실망한 손뿐이었다.(16~17쪽)
그녀는 자신과 사물들 사이에 존재하는 무언가에 대해 계속 생각한다. 매 순간마다. 어렸을 때는 아버지와 함께, 커서는 어머니와 숙모, 남편과 리디아, 그리고 그 남자와의 관계 속에서. 계속해서 무언가를 생각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억눌린 힘. 눈을 질끈 감은 채, 야수 같은 무모한 자신감을 통해, 폭력으로 터져 나올 준비를 마친 그 억눌린 힘을 모조리 발산하고 싶은 갈망을 달리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오직 악 안에서만 공기와 허파를 기꺼이 받아들임으로써 두려움 없이 숨을 쉴 수 있지 않았던가? 내겐 기쁨 그 자체도 악만큼 큰 기쁨을 주진 못했어, 그녀는 놀라며 생각했다. 그녀는 모순들과 이기심과 활기로 넘실대는, 자기 안의 완전한 짐승을 느꼈다.(21쪽)
그녀는 자기 안의 완전한 짐승을 느낀다. 그 억눌린 힘을 발산하고 싶어서 어쩔 줄을 모른다. 그것은 자신과 사물들 사이의 무언가에 대해 계속 생각하던 어렸을 때의 자신과 같다. 시간은 그녀를 아이에서 어른으로 변모시켰지만 그녀는 마치 처음 태어났을 때와 같이, 그때 가졌던 마음, 의문을 계속 지닌 채로 있다. 그것은 그녀의 깊숙한 곳에 있어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다.
나는 흐릿한 거울을 바라보면서 내 안에 내가 아는 것 외에도 너무 많은 것이, 늘 침묵을 지키는 너무 많은 것이 있음을 알게 되고, 거기에도 놀란다. 왜 말을 안 하지?(106쪽)
온통 의문들. 그 속에 그녀가 있다.
늘 새로 태어나는 것, 그동안 보고 배운 모든 것들과 단절하고, 가장 사소한 행동조차 의미를 지닌 곳에서, 마치 처음 숨을 쉬듯 공기를 마실 수 있는 새로운 영역에서 시작하는 것.(125쪽)
그녀는 늘 새로 태어나고 싶다. 그동안 보고 배운 모든 것들과 단절하고, 마치 처음 숨을 쉬듯, 새로운 영역에서.
그녀는 무언가를 말했다······. 그 말은 언어 이전의 근원, 근원 그 자체에서 나온 것이었다.(217쪽)
한 순간과 다음 순간 사이, 과거와 미래 사이, 그 틈새의 하얀 모호함. 원을 그리며 도는 시계의 분 표시 사이에 있는 공간처럼 비어 있는 것. 조용히 죽은 채로 드러나는 삶의 본질, 한 조각의 영원.(250쪽)
그녀는 자신의 삶을 살았다, 처녀처럼 열렬히―그리고 무덤으로 갈 것이다. 그녀는 스스로에게 많은 것들을 물었지만 아무것도 답하지 못했다: 그녀는 느끼기 위해 멈추어야 할 터였다. 삼각형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먼저 하나의 관념으로? 아니면 형상이 먼저 실현된 후에 나온 걸까? 삼각형은 숙명적으로 생겨나는가? 그 질문들은 풍요로웠고―그녀는 그 문제에 대해 생각하며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하지만 사랑이 그녀를 침공했다. 삼각형, 원, 직선들······. 아르페지오처럼 조화롭고 신비하다. 음악은 연주되지 않을 때 어디로 갈까?―그녀는 자신에게 물었다. 그리고 무방비한 상태로 대답했다: 내가 죽으면 사람들이 내 신경으로 하프를 만들기를.(274~275쪽)
나는 준비돼 있다. 눈을 감는다. 몸을 떨던 짐승이 태양을 향해 나아갈 때 가득 핀 꽃들은 장미로 변하고, 이렇듯 환영幻影은 말보다 훨씬 빠르니, 나는 말이 되지 않는 것들을 위한 장場을 탄생시키는 쪽을 선택한다. 데 푸로푼디스, 나중에 순수한 물줄기가 올 것이다. 나는 햇살 속에서 파리들과 함께 기어가는 내장의 시퍼런 기능機能하에서 장밋빛 구름으로 가득 차서 떨리는 눈雪을 보았다. 회색빛 인상, 구름 뒤에 존재하는 반투명한 녹색의 차가운 빛. 나는 눈을 감고 흰 폭포수처럼 일렁이는 영감을 느낀다.(319~320쪽)
그녀 안에서 솟아나고 있는 건 용기가 아니었다. 그녀는 인간 이하의 존재, 그저 물질에 지나지 않는데 어떻게 영웅이 될 수 있고 승리를 원할 수 있겠는가? 그녀는 여자가 아니었으니, 그녀는 존재였고, 그 안에 있는 건 움직임, 언제나 전환기에 머물고 있는 그녀를 들어 올리는 움직임이었다.(323쪽)
모든 것들이 다가와 나를 덮치기를, 심지어 새하얘지는 순간들마다 마주하게 되는 나 자신의 불가해함마저도 나를 덮치기를 바라노니, 왜냐하면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곤 자신에게 순응하는 것뿐이므로, 그러면 두려움―없는―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아무것도 나의 길을 막지 않을 것이며, 분투할 때나 쉴 때나 나는 어린 말처럼 강하고 아름답게 솟아오를 것이다.(325~326쪽)
이 소설은 그런 한 여자에 관한 이야기다. 탄생이자, 죽음이며, 부조리이자, 원천이며 존재 자체이면서 어떤 움직임인.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첫 소설이다. 이전에 읽었던 『별의 시간』 속 주인공과도 닮은 듯하다. 리스펙토르는 마치 주인공의 분신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의 소설 속 여자들은 세상의 부조리함 속을 떠다니는 존재 그 자체, 말 이전의 말, 존재 이전의 존재다. 자신이 여성임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리하여 그들은 언제나 '야생의 심장 가까이'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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