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독서

우리는 시간으로 빚어졌다

시월의숲 2026. 3. 28. 17:53

 
 
우리는 시간으로 빚어졌다.
우리는 시간의 발이며 시간의 입이다.
시간의 발은 우리의 발로 걷는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조만간 시간의 바람이 흔적들을 지울 것이다.(13쪽, '시간이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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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333편의 짧은 이야기들이 실려 있다. 그중 첫 번째 글을 읽자마자 나는 눈이 크게 떠지면서 책 속으로 이내 빠져들었다. 『시간의 목소리』라는 제목을 대변하는 듯, 당당히 첫 번째로 실려 있는 그 짤막한 글이 나를 완전히 사로잡은 것이다. 그 나머지 글이 어떻든 나는 이 책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겠다는 예감이 들었고, 그 예감은 적중했다. 
 
대체로 한 페이지를 넘기지 않는(두 페이지가 넘어간다면 이 책에서는 상당히 긴 편이라 할 수 있다), 짧은 이야기들이 무려 333편이나 실려 있지만, 사실 마냥 쉽게 읽히지는 않는다. 짧은 만큼 압축되고, 비유적이며, 심지어 시적(詩的)인 문체가 집중력을 요하기 때문이다.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는 몇 번이고 '누가 뭘 어쨌다고?' 하면서 첫 문장으로 돌아가기 일쑤였다. 그만큼 분절된 이야기들이, 333개의 저마다 다른 이야기들이 마치 거대한 퀼트처럼 직조되어 있다. 
 
'이 책은 내가 몸소 겪었거나 들은 이야기들을 들려준다'라고 책의 서문에 저자는 밝히고 있다. 작가의 말처럼, 참으로 다양한 이야기들이 실려있다. 라틴아메리카의 작가답게, 자신이 태어난 우루과이뿐만 아니라 아르헨티나, 브라질, 파라과이, 멕시코, 칠레 등에서 자신이 겪고 들었던 이야기들을 유려하게 풀어낸다. 유럽으로부터 침략당한 라틴아메리카의 역사에서부터 비롯된 수많은 고통의 이야기들과 현대 문명에 대한 비판과 원시적인 자연에 대한 이야기들, 그리고 축구에 관한 이야기까지 정말이지 다양한 소재와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렇듯 다양한 이야기들이 등장하지만, 이 책을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가 있다면 그것은 문명에 대한 비판이라 하겠다. 작가는 수많은 이야기들의 전달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비판적인 시선을 통해 그것을 예리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때로 유머러스하게, 때로 예지자적인 면모로, 때로는 냉소적으로. 그리고 그 모든 글의 심연에는 자신의 나라에 대한 애정과 슬픔이 함께 흐르고 있다. 그것은 어쩌면 침략을 당한 모든 나라와 그 속에서 신음하던 사회적 약자들의 목소리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읽는 시간은 라틴아메리카라는, 원시의 자연이라는, 인간의 근원이라는, 시간의 목소리라는 것의 보이지 않는 실체를 감각하게 되는 일이기도 했다. 그것이 나만의, 실로 편협하기 그지없는, 아주 미미한 오해일지라도, 그것을 느끼는 것은 새로운 경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