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최은미 외, 《2025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 문학동네, 2025.

시월의숲 2026. 4. 15. 23:08

셜리 잭슨이 한 시인에게 보낸 편지에 썼다는 문구. "나는 내가 두려워하는 것에서 기쁨을 느낀다"는 이 소설의 정동을 압축적으로 전달하는 듯하다. 소진되고 고립된 자들의 자기혐오와 구별되지 않는 사랑. 동정하는 만큼 사랑하고, 사랑하는 만큼 증오하며 파열하는 사랑. 강화길의 「거푸집의 형태」는 이 사랑을 끌어안으며 우리 소설이 한 번도 가닿은 적 없는 정동의 미답지에 들어선다. 끔찍한 두려움과 희열에 떨면서.(116쪽, 강화길 「거푸집의 형태」의 강지희의 리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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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즈음에는 말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다. 험한 말을 많이 듣게 된 탓일 수도 있고, 그런 말들을 그릇 씻듯이 좀 씻어버리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른다.(119~120쪽, 김인숙, 「스페이스 섹스올로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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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뱃속에 품고 있다는 건 그런 일이었다. 난데없는 공포와 견딜 수 없는 서러움. 그런가 하면 또 난데없이 들려 올라가는 듯한 성스러움.(125쪽, 김인숙, 「스페이스 섹스올로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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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벽에 박힌 색색의 돌. 그 돌들은 너무나 앙증맞아서 아무리 밟고 올라가더라도 꼭대기에는 미치지 못할 것 같았다. 설령 이른다 한들 종착지는 '떨어지는 곳'밖에 더 될까 싶었다. 다 올라가든, 다 올라가지 못하든 떨어지는 것 말고 달리 무슨 방법이 있겠나.(141쪽, 김인숙 「스페이스 섹스올로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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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무서워.

그리고 또 말했다.

나는 안 무서울 거라고 생각하니. 너는 내가 그럴 거라고 생각하니. 나도 가끔은 정말 무서워. 나도 내가 정말 무서워.(143쪽,

김인숙, 「스페이스 섹스올로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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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함을 사랑하니 결국 사소해지겠지. 뭔가 굉장한 것에 매혹되는 것도 그래서겠지. 내 삶이 사소하니.(146쪽, 김인숙, 작가노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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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가 끝나고 다음 노래가 시작되기 전의 짧은 정적 속에서 그녀가 무심코 거울 쪽으로 눈을 돌렸을 때 그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157쪽, 김혜진, 「빈티지 엽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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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친절과 선의가 완성되는 데에는 두 가지 조건이 있음을 배웠다.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 친절과 선의는 있는 그대로 주고 있는 그대로 받을 수 있는 두 사람 사이에서만 유효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오염되고 변질되고 공중분해되면서 자신 혹은 상대를 다치게 만드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누구나 쉽게 주고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취약했고 위험했고 다루기 까다로웠다.(161쪽, 김혜진, 「빈티지 엽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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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지금과 같은 삶을 살게 된 건 사소한 용기가 부족했기 때문이에요. 그걸 알아야 해요.(180쪽, 김혜진, 「빈티지 엽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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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하다거나 초라하다거나 보잘것없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충분하다거나 만족스럽다거나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녀의 일상은, 삶은 언제나 상반된 그 두 가지 마음 사이 어디쯤 머물러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180~181쪽, 김혜진, 「빈티지 엽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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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그는 불현듯 떠오른 어휘에서 강렬하고도 지속적인 예감을 얻는 일이 드물지 않다고 말한 적이 있다.(191쪽, 배수아, 「눈먼 탐정」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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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러운 혹은 갑작스러워 보이는 불행은, 다른 종류의 불행도 예외는 아니겠지만, 사실상 매일매일 우리 곁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상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흰 두부처럼 잘린 그것을 임의로 한 조각씩 나누어 가질 뿐이다. 그것을 삶이라고 부른다.(198쪽, 배수아, 「눈먼 탐정」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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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식으로 리 세 명은 서로 머나먼 거리에서 손과 손을 마주잡으며, 그런 식으로 어떤 머나먼 미지의 영향력 아래 함께 거주하는 것이고, 그러므로 나는 나 자신도 모르는 것을 모르면서 저절로 보게 되고, 그래서 그것을 모르면서 말하게 된다고 눈먼 탐정은 말했다.(205쪽, 배수아, 「눈먼 탐정」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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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끝나고 모든 것이 잊히고 죽은 다음 뒤늦게 우리를 찾아와 등뒤에서 우리의 목을 껴안는 사후 암시와도 같은 빛. 우리의 삶은 우리 안에 축적된 타인들의 무작위적 거울상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나는 눈먼 탐정에게 말했다.(206쪽, 배수아, 「눈먼 탐정」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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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눈이 오직 눈먼 거울인 것처럼 생각하라고, 눈먼 탐정이 내게 말했다. 그러면 정반대의 것이 비친다. 지금 여기가 아닌 그 무엇이. 보려고 애쓰지 말라고 눈먼 탐정은 말했다. 정반대의 것은 우리의 눈에 스스로를 저절로 비추기 때문이다.(207쪽, 배수아, 「눈먼 탐정」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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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보게 되는 거울상을 말해줘, 하고 눈먼 탐정은 내게 부탁했다. 그리고 마지막이 가까워올 무렵에는, 자신이 그랬듯이, 그것이 무엇이든 나는 그것을 만나게 될 거라고 말했다.(219쪽, 배수아, 「눈먼 탐정」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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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수아의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하나의 이야기를 손에 넣는 일(소유)이라기보다, 자기(라고 여겨지는 것)를 내어놓고, 약간의 불안과 설렘을 감각하며 낯선 세계의 윤곽을 더듬어보는 사건에 가깝다.(227쪽, 김미정의 「눈먼 탐정」 리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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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금 삶에 갇혔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몸은 성장하지만 정신은 크레바스 같은 틈에 갇혀 옴짝달싹 못하는 답답함. 나라는 인간은 알맹이 없는 돌멩이. 육체에 갇힌 영혼. 어둠에 갇힌 빛, 존재에 갇힌 영원. 나는 대출금이고 월세이며 생활비다. 속수무책의 감정 쓰레기통이다. 반복되는 일상과 진전 없을 미래가 나의 외피이자 알맹이라고 생각하면 우주선 없이 대기권 밖으로, 지구 바깥으로 나가고 싶다. 타들어가겠지. 얼어붙겠지. 산산이 부서져 무한한 공간에서 마침내 자유롭겠지. 천재 과학자 리처드 파인먼은 인류 멸망을 앞두고 남길 단 한 문장으로 '세상 모든 것은 원자로 되어 있다'를 선택했다고 한다. 나는 그 문장이 좋다. 나는 원자의 합일 뿐이고 죽으면 흩어진다.(239~240쪽, 최진영, 「돌아오는 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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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사람을 잃고 같이 울 수 없는 마음. 인공지능은 사람의 그와 같은 마음도 알고 있을까.(247쪽, 최진영, 「돌아오는 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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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인은 그 순간을 여러 번 곱씹었다. 영인은 이미 넘어갔다고 생각했고 인범은 넘어가지 못한, 바로 그 순간을. 인범은 좀전의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다고 믿었고 영인은 그걸 끝내고 다른 화제로 넘어갔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몇 마디 말을 더 주고받다가 동시에 그걸 깨닫고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292쪽, 황정은, 「문제없는, 하루」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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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한테 정말 중요한 일들이 있어. 내가 생각하기엔 사람들에게도 정말 중요한 일들이거든. 그래서 나는 자꾸 그걸 말하는데, 말하면 시답잖은 일이 돼.

시답잖아져, 말하면서.

말하면, 내가 그걸 말하면, 사람들은 그 진부하고 지루한 이야기를 왜 여태 하느냐는 얼굴로 나를 봐. 아니면 지금 이 자리에 그 이야기가 왜 나와야 하는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곤란하고 안쓰럽다는 것처럼 얼굴을 찡그리면서 나를 봐. 그러면 나는 사람들이 그 일을 얼마나 신경쓰지 않는지를 알게 돼. 그게 그 사람들에겐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는 걸 알게 돼. 내게 너무, 너무 종요한 그 일들이, 사람들한텐 중요하지 않아.

그걸 보게 돼.

그게 어떻게 나를 죽이고 있는지, 언니는 몰라.(293쪽, 황정은, 「문제없는, 하루」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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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언제고 돌이킬 수 없이 망가진다면 사람의 악의나 적의 때문은 아닐 거야. 그보다는 멍청함 때문일 거야.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음, 그런 거 때문에.(311쪽, 황정은, 「문제없는, 하루」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