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구병모, 《절창》, 문학동네, 2025.

시월의숲 2026. 5. 4. 21:46

 

어떤 진실은 은닉과 착란 속에서 뒹굴 때 비로소 한 점의 희미한 빛을 얻기도 합니다.(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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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를 읽을 때는, 읽음의 행위 끝에 도출한 결론이 틀렸을 가능성을 언제나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하물며 무언가가 아닌 누군가를 읽을 때는 더욱 그러합니다.(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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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기와 듣기, 쓰기와 읽기란 비록 그것으로 인해 변하는 실재가 없음은 물론 그것이 거쳐가는 길이 모순의 흙과 불화의 초목으로 닦이고 마침내 도달하는 자리에 결핍과 공허만 남아 영원한 교착상태를 이룬다 한들, 그 행위가 한때 존재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누군가의 영혼이 완전히 부서져버리지 않도록 거드는 법입니다. 언어의 본질과 역할을 두고 명멸하는 무수한 스펙트럼 가운데 그것만큼 괜찮은 구실이 또 있는지 나는 아직 알지 못합니다.(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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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보다는 희극이 좋아?"

"뭐든 상관없지 않나요. 어차피 다 거짓말이니까."(140~1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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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의 반대가 반드시 진실이라는 법은 없지. 진실은 사실하고는 또 달라."

"그럼 우선은 진실 말고 진심으로 하지."

"진실을 진심으로 대체하기는 더 어렵지 않나."(1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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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이름이란 몇 개의 음절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원한 적 없을뿐더러 때로는 당혹스러울 뿐인 약속의 표기에 불과하니까.(157~1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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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고용된 입장에서는 돈 준다는데 뭘 따질 이유가 없기도 하거니와, 그보다 인간에게는 과잉이 필요한 법이니까요. 무언가를 초과하고자 하는 마음, 잉여를 축적하고자 하는 욕망이 인간을 다른 동물과 다르게 만듭니다. 하물며 배움의 과잉은, 무엇을 배우는지가 때로는 관건이겠습니다만 인간에게 시간이 남아 있는 한 아무리 넘쳐도 해로울 것 없다고 생각합니다. 진학을 위해, 승진을 위해, 그 어떤 실용적인 목적만을 위해서라면 배움은 얼마나 아름답지 않은 것이 되겠습니까.(1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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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자면 책을 읽고 반드시 무언가를 느껴야만 하는 것인지, 인간은 바로 그 지점부터 문제 삼을 수 있습니다. 그것도 일종의 고정관념과 강박의 소산 아닐까요.(1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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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원래 그런 존재야. 뭐라도 저지르지 않으면 견디지 못해서 매일같이 개인적이거나 사회적인 크고 작은 전쟁을 일으킨 다음, 전쟁터에서 녹초가 되어 침대로 돌아와선 요가 명상 사운드를 들으며 잠을 청하지.(1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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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말이라는 게 제 몸 밖으로 나올수록 구차해지고 빈약해지는 건가, 아니면 단순히 내가 말하기에 소질이 없어서 제대로 활용을 못하는 걸까. 말이 원래 그런 거라면 언제까지고 의미에 그리고 본질에 닿지 못하는 거겠네. 한 사람이 가진 말의 기능이 이토록 부실하고 극단적인데 나는 타인의 생각을 읽을 줄 안들 무슨 소용이 있나, 어차피 그것을 표현하려면 말을 동원하지 않을 수 없는데.(1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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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을 창작하는 사람 가운데 보통보다 나은 인간이 있기는 할까요. 문학을 읽는 사람 가운데 도둑이나 사기꾼이나 강간범이 없겠습니까. 예를 들어 내면을 가꾸어주는 클래식 음악을 사랑하고 작곡가와 연주자별 특징까지 꿰는 기품 있는 인간은 동시에 언제나 윤리적인 인간일까요. 모차르트나 베토반을 BGM으로 틀어놓는 연쇄살인마를 상상하기 어렵습니까. 우리는 나치가 대학살극을 벌인 수용소에서 유대인들을 동원한 클래식 연주를 그럴듯한 대외 홍보 수단으로 삼아 외부에 눈속임을 했다는 걸 잊어선 안 됩니다. 음악을 듣고 마음이 아름다워지는 게 절대적인 사실이라면, 학살은 일어날 수 없었을 겁니다.(2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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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가 무용하다고 하여 그것을 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고 기본적으로 생각합니다. 대학에 진학할 가망이 없다고 판단한 모든 학생이 중고등학교를 때려치우지는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요. 책을 읽었다 하여 훌륭한 인간이 된다는 보장은 없으며, 때로는 뱀의 몸통을 손으로 붙잡는 식으로 책을 이상하게 읽고서 오히려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인간이 되는 경우도 없지 않지만, 보통은 책을 읽고 난 뒤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 그게 가장 일어나기 쉬운 일입니다. 무용하면 무용한 대로 다만 이어가는 것, 그것이 읽기 아닐까요.(2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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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라는 건 있잖아, 그냥 하나의 오래된 질문이라고 생각해."(2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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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의 책을 펼칠 때 잊지 말아야 할 게 있다면, 세상의 코어를 이루는 것이 반드시 희망 내지 사랑만은 아니며 도저히 화해할 수 없는 인간들과 혹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나 자신과 필연적으로 상종하거나 공존하는 것이 인간의 삶이자 태초부터 운명 지어진 비극이라는 사실이지. 그리고 그 비극을 견디는 게 인생의 거의 전부야. 그렇다면 인생에는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인생의 목표라는 게 다 무슨 소용인지 되물을 필요는 없다. 자연은 우리에게 목표를 부여하지 않았고, 우주는 우리의 의미 따위 알지도 못할뿐더러, 신은 우리에게 별 관심이 없으니까.(3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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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없는 관계라는 게 일찍이 존재나 하는 것인지 나는 모르겠다. 상처는 사랑의 누룩이며, 이제 나는 상처를 원경으로 삼지 않은 사랑이라는 걸 더는 알지 못하게 되었다. 상처는 필연이고 용서는 선택이지만, 어쩌면 상처를 가만히 들여다봄으로 인해, 상처를 만짐으로 인해, 상처를 통해서만 다가갈 수 있는 대상이, 세상에는 있는지도 모르겠다고.(34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