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1 11

단상들

* 창문을 열어 두었다. 창 밖으로 가을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진다. 바람은 선선하고, 햇빛은 따뜻하고, 그늘에 있으면 햇살을 찾고, 햇살 아래 있으면 그늘을 찾는 계절. 한참 창문을 열어놓고 있으니 실내화를 신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양말을 신지 않은 발이 서서히 차가워지는 것을 느낀다. 그래, 서늘함이야말로 가을의 진정한 속성이 아닌가. 그리하여 따뜻함을 찾게 되는 것. 서늘함과 따스함이 공존하는, 시간의 한 통로에 서 있다. 나는 천천히 일어나 열어 둔 창문을 닫는다.(20251116) * 같은 말을 듣더라도 다 다르게 듣는다. 네 처지와 내 처지가 다르고, 생각이 다르고, 느낌이 다르고, 받아들이고 처리하는 방식이 다르다. 사람의 생각을 바꾸는 건 쉽지 않다. 누군가의 마음에 조금이라도 가 닿는 것은..

입속의검은잎 2025.11.30

삶은 아름답고 덧없었으며, 젊음은 아름답고 빠르게 시들어갔다

이십 년 뒤, 골드문트 자신은 어떻게 될까? 아, 모든 것이 불가해하구나, 모든 것이 아름답지만, 그럼에도 세계는 슬픈 것이로구나.(103쪽, 헤르만 헤세,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그책, 2018.) 이십 년 전의 나는, 이십 년 뒤의 내가 어떻게 될지 당연히 알지 못했다.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나는 계속 나로 살아갈 테지만, 그 무엇도 되지 못했던 그때는, 이십 년 뒤 아니, 몇 전 뒤의 나도 상상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다가올 미래에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을지에 대한 막연한 불안이 아니었을까. 우리는 모두 무엇이 되어야만(한다고 종용당)하고, 결국 무엇이든 될 수밖에 없지만, 무엇이 될지는 그것이 되어보기 전까지는 결코 알 수 없으므로 그 불안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

흔해빠진독서 2025.11.29

헤르만 헤세,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그책, 2018.

전혀 머뭇거리는 기색 없이 수도원으로 들어선 골드문트는 벌써 친구가 될 만한 존재를 둘이나 만난 기분이었다. 그건 바로 밤나무와 수위였다.(18쪽) * 검은 머리에 마른 체격인 나르치스에 비해 골드문트는 피어나는 꽃송이처럼 밝고 찬란했다. 나르치스는 철학자에 분석가였지만, 골드문트는 몽상가에다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해 보였다. 하지만 그런 표면적인 대립성은 그들의 공통점을 더욱 강하게 만들 뿐이었다. 둘은 모두 고결했다. 두 사람 모두 재능과 개성이라는 면에서 다른 이들보다 확연히 뛰어났다. 두 사람은 어떤 특별한 경고를 받고 세상에 태어난 운명이었다.(26~27쪽) * 사랑으로 충만한 인간, 섬세하고 풍부한 감각의 소유자, 꽃향기와 아침의 태양, 한 마리의 말, 날아가는 새, 그리고 음악을 깊이 ..

프랑켄슈타인

죽음이 허락되지 않는다면 이걸 생각해라, 아들아. 살아 있는 동안엔, 네게 주어진 길은 살아가는 것뿐이라는 걸. 살아라. - 기예르모 델 토로, 《프랑켄슈타인》 중에서 *오로지 생명의 탄생에 대해서만 생각하고(마치 자신이 신이라도 된 것처럼!) 그렇게 탄생한 존재의 삶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은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에 의해 태어남을 당한 아들의 비극적 이야기. 갑작스럽게 맞닥뜨리게 된 삶이라는 난감함을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는 우리 앞에 놓인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열망과 사랑은 얼마나 폭력에 가까운가?

봄날은간다 2025.11.22

단상들

* 나는 아주 오래전에 흩어진 별의 잔해를 찾고 있는지도 몰라.(20251102) * 오늘 사촌 동생의 결혼식에 다녀왔다. 핑크빛 한복을 차려입고 올림머리를 한 고모의 모습이 생경하면서도 잘 어울렸다. 이상하지, 이렇게 경사스러운 날에 고모의 표정이 슬퍼 보였던 건 나만의 착각이었을까? 나 역시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여서, 이게 도대체 무엇일까 계속 생각했다.(20251102) * 입 밖으로 내기 잔인한 꿈을 꾸었다. 보통 꿈은, 깨고 나면 구체적인 내용은 생각나지 않고 어떤 감정의 덩어리만 앙금처럼 남아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번 꿈은 그렇지 않았다. 새벽에 잠시 깼다가 다시 잠들었을 때도 꿈은 이어졌다. 아니, 이어진 것이 아니라 반복되었다. 그 불쾌한 감정들이.(20251102) * 나도 감기..

입속의검은잎 2025.11.15

그대와 함께하는 모든 순간이 소풍 같았소

얼마만의 만휴정이던가. 올해 산불로 인해 만휴정이 전소되었다는 추정 기사를 본 적이 있다. 확인하지 못한 기사를 왜 그리 성급하게 쓰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소식을 듣고 실망과 안타까움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다행히 화마를 피했다는 소식을 듣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오랜만에 가 본 만휴정은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군데군데 피해의 흔적들이 보이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더구나 만휴정 둘레로 멋들어진 풍채를 자랑하던 키 큰 소나무들이 모두 누렇게 변해버려서 안타까움을 더했다. 그것은 산불의 피해는 아닌 것 같았다. 어쩌면 병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휴정은, 그곳의 풍경은 여전히 고풍스러웠다. 커다란 바위와 바위 사이로 흘러나오는 - 마치 커다란 검은 붓으로 그린 것 같은 - 계곡물은 얕은 ..

토성의고리 2025.11.13

강원택, 《한국 정치의 결정적 순간들》, 21세기북스, 2019.

한국 정치에 대한 답답함은 국민의 요구에 귀 기울이지 않아도 선거에서 그에 대한 평가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현재의 정치 구조에서 비롯된 것이다. 지역주의, 이념, 당파성 등 국민을 갈라놓고 줄 세우기 해서 어느 한쪽을 선택하도록 강요하는 현행 정치 구조를 깨뜨리지 않고는 한국 정치의 변화를 기대하기는 어렵다.(12쪽) * 청와대 비서들과 대통령의 관계는 법률적, 제도적 관계이기보다 기본적으로 대통령의 신임이라고 하는 개인적 관계에 기초해 있다. 그리고 비서실의 일차적 관심은 정책보다 대통령 개인에 집중될 수밖에 없다. 그런 만큼 국가 정책 전반을 총괄적으로 살펴보거나 정책의 효율성을 따지기보다 대통령의 뜻을 받느는 것이 더 중요할 수밖에 없다. 청와대 안에서 대통령의 뜻과 다른 목소리가 나오기 어려..

나는 마침내 풍경의 일부가 되었어

오래전에 나는 그것을 읽었으나 늘 그랬듯 처음 읽는 것 같았어. 아니, 처음 읽는다는 것이 맞는 말일 거야.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의 나와 지금 이 책을 읽은 나는 어쩌면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기 때문이지. 나는 어쩔 수 없이 나지만,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달라. 그동안 내가 (어떤 식으로든) 변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야.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야. 그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이지. 내가 변했다기보다는 내가 이 책을 읽었던 순간 나를 둘러싸고 있던 것들이 변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거야. 그리고 기억은 변해. 아니, 기억은 사라져. 심지어 그것을 읽고 있는 순간에도. 나는 한 도시를 떠나 다른 도시로 살러 갈 때는 과거 머물렀던 장소에 속했던 친구들과의 관계를..

흔해빠진독서 2025.1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