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는나의힘

개 이전에 짖음

시월의숲 2025. 3. 30. 16:49

이 산책로는 와본 적이 없는데 이상해.

다정한 편백나무들 그림자들 박쥐들

가지 않은 길에서 길을 잃어본 적이 있어요?

만나지 않은 사람과 헤어진 적은?

 

어제는 죽은 사람과 함께 걸어갔는데

마치 죽지 않은 사람처럼 그이가 내 팔짱을 끼었는데

내 팔이

스스르 녹아갔는데

 

기억하나요? 여기서 우리는 보자기를 바닥에 깔고 앉아 점심 식사를 했었잖아요. 보자기라니 정말 우스워. 식빵에 잼을 발라 먹었죠. 오래전에 죽은 강아지 이야기를 하면서 웃음을 터뜨렸는데

 

대낮이고 사방이 캄캄하고 처음 보는 길이었지. 길을 잃기에 좋은 길이었다. 이미 죽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가 

왈왈, 짖고 싶은 기분이었다가

 

아마도 나는 당신의 미래의 오후의 꿈속에

조용한 기억에 담긴

잼 같은 것인가 봐요

끈적끈적 흘러내리나요.

달콤한가요.

 

강아지 한 마리가 왈왈,

짖으며 따라왔다.

저것은 개이기 이전에 짖음 같구나.

저기 저이는

만나기 전에 헤어진 사람 같구나.

 

우리는 편백나무들 사이에서 식사를 마치고

다 녹아버린 팔을 흔들며 안녕,

하고 인사를

 

당신은 곧 나와는 다른 기억을 가질 거예요. 그건 아름다운 일

우리는 태어나기 이전에 이미 죽었는지도 몰라서

밤이 오기도 전에 캄캄한 

이 숲에서 이렇게

 

잘 구운 빵에 빨간 잼을 발라 먹어요.

맛이 있어요. 맛이.

아직 혀에 닿지도 않았는데 맛이 있어서

그게 슬퍼서

 

당신의 얼굴이 다 녹어버렸어요.

나의 생각은 지금 너무 뜨거워.

빨갛고 달콤한 잼이 된 것 같아요.

끈적끈적 흘러내리고 있어요.

 

 

- 이장욱, 「개 이전에 짖음」 전문(시집 『음악집』 수록)

 

 

*

이장욱의 시집을 읽고 있어요. 와본 적이 없는 산책로에 서 있는 사람처럼. 이상하지. 가지 않은 길에서 길을 잃어본 적이 있는지, 만나지 않은 사람과 헤어진 적은 있는지, 강아지 한 마리가 왈왈, 개이기 이전에 짖음 같은, 우리는 태어나기 이전에 이미 죽었을까요? 밤이 오기도 전에 캄캄한 숲에서 아직 혀에 닿지도 않았는데 맛이 있는, 이상한 기분. 말이 되지 않는 말들을 들으면 어떤 기분이 들어요? 그것은 말 이전의 소리일까요? 개이기 이전에 짖음 같은. 말이 되지 않지만 말이 되는 것 같은.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은, 그런, 이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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