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독서

속삭임 우묵한 정원

시월의숲 2024. 9. 25. 21:48

 

 

 

무슨 일인가 일어났다. 그것이 나를 본다.(10쪽)
 
 
*
그리고 그는 자신을 보는 그것을 쓴다. 바로 자신을 보는 그것이 되어.
 
이 소설은 제목 그대로 자신의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속삭임'에 대한 글이자, 그 속삭임의 근원일지 모르는 자신의 '우묵한 정원'에 대한 글이다. 누군가는 동어반복일 뿐이라고 힐난하겠지만 어쩌겠는가. 나는 이렇게밖에 말할 수가 없다. 그리고 편지. '사람에게 가장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는' '발신인 없는 편지'에 대한, 결국 나에게로 수렴될 수밖에 없는 나 자신에 대한 글.
 
나는 이 소설이 마치 이 소설 바로 전에 나왔던 작가의 산문집 《작별들 순간들》의 소설 버전으로 받아들여졌다. 혹은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작별들과 순간들 중의 한 장면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그는 《작별들 순간들》의 에필로그에 이렇게 썼다. '이것은 글자 그대로, 오직 이 정원을 따라서 쓰인 글이다. 어느 날 내가 우연히 도착하게 된, 투야나무 울타리 뒤편의 보이지 않는 정원. 거기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라고. 그리고 이 소설, 《속삭임 우묵한 정원》 맨 처음에 이런 문장이 있다. '편지가 도착하던 바로 그 순간 나는 어떤 것과 우연히 마주친 직후였는데, 그것은 내가 잘 안다고 말할 수 없는 장소인 숲이었다. 심지어 나는 그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노라고 고백해야 한다.' 나는 마치 '작별들 순간들' 속 정원과 '속삭임 우묵한 정원' 속 숲(황야풀 정원)이 같은 장소일 것만 같은 상상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이 소설을 읽는 내내 나는 '작별들 순간들'을 떠올렸으며, 아주 당연한 듯 나는 이 두 책을 마치 한 쌍의 작품처럼 느꼈다. 그리고 그 착각이 나는 내심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그 두 책이 아주 다르다는 상반된 생각에 사로잡힐 때가 있었는데, 그것은 어떤 서사의 의미 없음(혹은 중요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특히 배수아의 작품들에서 산문과 소설의 경계는 '나이프로 성서를 가르듯' 명확하지 않지만(나는 그것이 무척 마음에 들지만), 분명 좀 더 소설적인 것이 이 책에는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끊임없이 과거를 기억하는 방식이 '소설적'이기 때문일까? 하지만 '소설적'이라는 것은 또 무엇인가. 생각건대, 적어도 배수아의 작품들에서 소설과 비소설의 경계는 아마도 자유로움에 대한 정도의 차이일 것이다. 아, 이런 말들은 다 무슨 소용인가. 소설이든 산문이든 그 무엇이든 배수아에 의해서 쓰였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한 일일 텐데. 그가 번역한 작품들도 모두 다 그의 작품들인 것만 같으니.
 
나는 그의 작품의 매력은 발화되는 문장들의 낯설고 매혹적인 울림에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매번 그 문장들에 매혹된다. 예를 들어 이런 문장들.
 
"일생 동안 나는 무의식 중에 내 귀에 울려온 그 메아리를 되풀이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내 몸은 공명하는 돌의 동굴이야, 비로소 깨어난 돌의 울음이야, 너도 그런 동굴을 가졌는지? 너도 그런 목소리를 가졌는지? 이 목소리를, 들어봐, 지금 내가 하는 말을, 숨이 멎을 만큼 놀라워라, 내 안에는 얼마나 아득한 공허가 있었던 걸까, 내 안에는 얼마나 많은 것들의 말이 묻혀 있었던 걸까, 나는 그의 무덤이었던 거야, 이 말을, 나를 통해서 말해지는 이것을, 너도 듣는지, 아주 멀고도 우묵한 곳에서 올라오는 것 같은 이 속삭임을."(152쪽)
 
나는 무수히 많은 문장에 밑줄을 긋는다. 어쩌면 단순하기도 하고, 집요하기도 한, 짧고도 긴 문장들의 끊임없는 이어짐에 나는 매번 낯선 아름다움을 느낀다. 이야기에 집중하기보다는 어떤 순간들, 자신을 사로잡은 짧고도 강렬한 순간들, 낯설고도 독특한 사유의 감각적인 묘사에 빠져들 수 있다면, 그는 배수아라는 세계에 들어간 셈이다. 그 세계는 무척이나 낯설지만 지극히 아름다운 ― 어디서도 본 적 없는 독특한 ― 매혹으로 가득하다. 그리하여 급기야는 그 속에 머무르고 싶어지는 것이다. 이번에는 꿈이 아니라 내면의 속삭임이라는 형태로, 편지라는 형태로, 집과, 정원과 초상화와 티벳개라는 형태로 그것을 드러내 보인다. 그 모든 것들이 마치 꿈처럼 보이기도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