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은간다

인간이 인간인 이유-인간이라는 이름의 동물에 대해...(영화 '28일후' 를 보고)

시월의숲 2005. 3. 17. 11:24

  흔히 우리는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합니다. '만물의 영장'이라... 참으로 위대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는 인간이 다른 동물들에겐 없는 언어를 사용하며 문화라는 것을 향유할 줄 아는 고차원적인 사고를 지닌 특별한 종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눈부시게 이룩해 놓은 과학기술의 발전만 보아도 인간들이 하는 자화자찬의 말은 그럴듯하게 들립니다. 하지만 그런 인간의 고상한 면이 오히려 인간을 헤어날길 없는 동물적 늪으로 빠뜨리고 있다고 한다면, 자신이 놓은 덫에 자신이 걸린 꼴이 되어 버렸다면?

  대니 보일 감독의 최근작 '28일후...'는 인간이 인간일 수 밖에 없는 이유, 즉 인간이 동물이면서도 동물과는 다를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스릴감 있게 보여줍니다. 감독은 인간을 극한까지 밀어넣었을 때 어떻게 되는가에 관심이 많은듯 합니다. 감독의 전작인 '트레인스포팅'의 마약중독자들과 '비치'에서 무인도에 떨어진 인물들까지. 이번 영화도 도시 전체가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정상인들이라고는 거의 찾아 볼 수 없는 상황에 던져진 남자를 보여줍니다.

  퀵서비스맨인 '짐'은 어느날 배달을 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주위엔 아무도 없습니다. 병원에서 나와 텅빈 런던의 거리를 홀로 돌아다니던 짐은 눈이 시뻘겋고 난폭하게 날뛰는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을 피해 도망가다가 신분을 알 수 없는 두명의 사람에게 도움을 받아 피하게 됩니다. 난폭하게 날 뛰던 사람들은 원숭이한테 실험하던 어떤 바이러스가 퍼지고 퍼져서 감염된 자들입니다. 그 바이러스의 이름은 바로 '분노' 입니다.
짐 일행은 우여곡절 끝에 비교적 감염자들로 부터 안전한 군기지를 찾아내지만 그곳에서 그들를 기다리는 것은 바이러스 보다 더 무서운 것이었습니다. (영화를 아직 안 보신 분들을 위해 더 이상 이야기는 하지 않겠습니다.)

  감염된 자들이 미친듯이 짐 일행을 쫓아 오는 장면에서는 혹시나 저들중에 누군가 감염되지 않을까 하는 무서움에 나도 모르게 손에 땀이 나기도 했지만 가장 무서운 건 어떠한 바이러스도 아니고 그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들도 아니었습니다. 그건 바로 다름아닌 인간들이었습니다. 그것도 지극히 정상적인 인간들. 인간들을 위해 실험을 하던 바이러스에 의해 인간들이 쫓기는 꼴이라니...

  물론 이 영화는 가상의 현실을 그리고 있는 것이지만 또한 일어날 법한 현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감독도 인간이 인간이기 이전에 동물임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영화 속 바이러스의 이름이 '분노'인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즉 인간도 자연의 한 부분임을 망각한 벌이 분노라는 이름으로 인간에게 되돌아 온 것입니다.

  하지만 감독도 역시 인간이기에 인간에 대한 희망 또한 버리지 않습니다. 희망, 그것이 바로 인간이 인간일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아닐런지요. 인간의 어리석음으로 파괴된 도시에서도, 절망과 분노만이 가득한 황폐한 거리에서도 나약한 인간이 가질 수 밖에 없는 것은 바로 희망일 것입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나약합니다. 하지만 모든 약한 동물에게는 그에 맞게 살아가는 방법이 있듯이 인간에게는 생각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 생각하는 능력으로 우리는 우리의 나약함을 숨길 수 있었고, 지금과 같은 문명을 발전시킬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문명과 문화가 발전했다고 해서 인간의 나약함이 완전히 사라진 것일까요? 결국 그것은 인간이 나약함을 반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인간이 진정 강해지기 위해서는 자신속에 내재된 나약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은 자연의 일부로, 자연스럽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영화 '28일후...'는 인간에게 가장 무서운 적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말하는 영화입니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희망 또한 버리지 않는, 인간들이 만든 인간들의 영화이기도 합니다. 어찌되었든 우리는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