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은간다

인간의 특별함에 대한 욕망(영화 '젠틀맨리그'를 보고)

시월의숲 2005. 3. 17. 11:25

  내가 어렸을 적 명절 때가 되면 친척들로부터 종합선물세트를 받은 기억이 있다. 요즘은 아이들에게 무슨 선물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거의 대부분의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줄 명절 선물로 색색의 그림들로 포장된 큼지막한 종합선물세트를 많이 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보고 나서야 아, 정말 명절이구나 하는 생각에 설레곤 했다. 그 종합선물세트에는 여러가지 종류의 과자며, 사탕, 껌 등이 뽐내듯 들어 있었는데, 우리집 같이 사촌 형제들이 많은 집이면 서로 맘에 드는 과자 먹겠다고 한바탕 전쟁을 치뤄야 했다. 갑자기 영화게시판에서 왠 종합선물세트 이야기냐고? 그건 내 이런 추억이 생각나게 된 계기가 '젠틀맨리그'라는 영화를 보고 나서이기 때문이다.

  '젠틀맨리그'라는 영화는 마치 그때의 종합선물세트 같은 영화다. 서로 다른 시대, 다른 나라에서 한 가닥씩 하는 인물들이 '젠틀맨리그'라는 이름으로 세계평화를 위해 한 자리에 모인 것이다. 스파이, 드라큐라, 캡틴, 불사신, 지킬박사, 투명인간 등... 그 이름만 들어도 귀가 솔깃해지는 인물들이 모인 이 영화의 처음 15분간은 종합선물세트를 받아 들고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뜯는 심정이었다. 안에 과연 무엇이 들었을까 하는.

  하지만 영화는 내 기대를 철저히 배신했다. 뜯어 보니 별로 신통찮은 내용물이 든 선물세트를 볼 때와 같은 기분이었다. 물론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대거 등장하는 이 영화는 뭇 사람들의 흥미를 일으키기에는 충분하나, 그게 다다. 무언가 밋밋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거 없다는 옛말이 딱 들어맞는 순간이다. 왜 그럴까?

  전체적으로 이 영화는 짜임새가 허술하다.(물론 난 영화평론가가 아니므로 이 말은 주관적인 내 생각일 뿐이다) 충분히 매력적인 등장인물들이 나옴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그들의 개성을 십분 살리지 못했다. 그리고 이 모든 주인공들이 같은 편을 이룬데 반해 이들의 적이라고 할 수 있는 M이라는 인물은 그 카리스마가 영 부족하다. 힘이 달린다는 말이다. 영화의 말미에 반전(요즘 헐리우드는 반전을 굉장히 좋아하는 것 같다)이라고 얼마간 뒤통수를 때리긴 하지만 그것도 미약하다. 내용이 허술한데 그 내용을 조금 뒤집는다고 뭐가 크게 달라지겠는가?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해서 그저 그런 영화란 이야기다. 다만 주인공인 숀 코네리(늙어도 멋있는...)와 드라큐라로 나오는 여자배우(이름은 기억이 안남)의 독특한 매력과 보이스가 그나마 기억에 남는다.

  영화는 그러했지만, 이 영화를 보고 문득 생각난 것이 있다. 그것은 인간의 특별함에 대한 욕망이다
'젠틀맨리그'의 주인공들 뿐만 아니라, 영화 '엑스맨'에서도 주인공들은 특별한 능력을 지녔다. 그래서 그들은 일반인들에게 따돌림을 받고 결국 대적하게 된다. 하지만 그런 대결의 밑바닥에는 일반인들의 특수한 능력에 대한 어떤 동경이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 '젠틀맨리그'의 주인공들처럼 나도 특별해지고 싶은 욕망, 남들과는 다른 나만의 능력을 가지고 싶은 욕망, 나아가 많은 사람들에게서 우러러 보이고 싶어하는 욕망... 현대인들이 가진 튀고 싶어하는 열망도 그러한 욕망의 변형일 것이다.

  나는 인간의 모든 문화와 예술작품들이 원초적으로 욕망의 산물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영화도 예외는 아니다. 특히 영화는 인간들이 산출해 낸 욕망덩어리다. '클래식'은 이루지 못한 첫사랑에 대한 욕망, '실미도'는 억울하게 묻혀버린 역사를 다시 바라보고자 하는 욕망... 그런 의미에서 난 '젠틀맨리그'라는 영화를 본다. 특별하고 싶은 현대인의 욕망. 하지만 그런 욕망이 잘 반영되었는지는 의문이다. 거대 자본주의 사회에 있어서 인간의 모든 문화활동들은 돈에 좌우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영화도 돈에 의해 굴절되어 있지는 않는지...

  영화를 보고 한가지 불만이었던 것은 '젠틀맨리그'에 왜 동양계 영웅은 없느냐 하는 점이었다. 세계평화가 자기네들만 있으면 해결이 되는건가? 아님, 그냥 보고 넘기면 될 영화에 내가 너무 과민반응하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