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는나의힘

어둠의 단애 - 류인서

시월의숲 2005. 7. 17. 11:31

어둠의 단애

 

 

                                                 - 류인서

 

 

저문다는 것, 날 저문다는 것은 마땅히 만상이 서서히

자신의 색을 지우며 서로의 속으로 스미는 일이라야 했다

알게 모르게 조금씩 서로의 그림자에 물들어가는 일이라야

했다 그렇게 한 결로 풀어졌을 때, 흑암의 거대한 아궁이

속으로 함께 걸어가는 일이라야 했다.

 

너를 바래다주고 오는 먼 밤, 제 몫의 어둠을 족쇄처럼 차고

앉은 하늘과 땅을 보았다 개울은 개울의 어둠을 아카시아는

아카시아의 어둠을 틀어 안고 바윗덩이처럼 딱딱하게 굳어

가고 있었다 누구도 제 어둠의 단애 밖으로는 한 발짝도

내딛지 못하고 있었다 한 어둠을 손 잡아주는 다른 어두움의

손 같은 건 볼 수 없었다.

 

 

- 시집 <그는 늘 왼쪽에 앉는다> 중에서

 

 

* * *

 

이 시를 읽고 제일 먼저 아! 하는 짧은 탄성이 나왔다.

그것은 새로운 것을 깨달았을 때의 느낌이기도 했지만,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을 다시 체험했을 때의 느낌이기도 했다.

 

어둠...

오래전 그것은 나를 둘러싸고, 내 숨통을 막으며, 종래에는 나를 죽이려는 불길한 징조로 생각했다. 내 주위엔 온통 어둠 뿐, 그 어느 곳에도 출구는 없는 듯 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힘겹게 내미는 내 손마저 어둠 속에서는 그 형체가 없었다. 나는 두려웠다. 내가 나를 보지 못한 나날들...

 

어둠과 혼돈의 시간들 속에서, 나는 언젠가 들었던 하나의 문장을 떠올렸다. 어둠이란 어두워서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어둠이 보이는 것이라는 말. 그 말은 내 무의식 속에 떨고 있는 나를 의식으로 끌어올렸다. 어둠이 보인다니. 나는 어둠을 정면으로 보았다. 그 보이지 않음을 보려했다. 그래서 나는 결국 살아남았다.

 

어둠은 모든 것을 물들인다는 말은 거짓이다. 어디에도 '한 어둠의 손을 잡아주는 다른 어두움의 손'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사랑했던 너와 개울과 아카시아와 골목길과 어머니, 어머니... 모든 것들은 제 몫의 어둠을 족쇄처럼 차고 있다. 내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그러한 어둠의 속성을 온몸으로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내 안의 어둠을 보았다. 그것은 죽음의 냄새를 풍기고 있었지만 나는 코를 막지도,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다. 지금까지 내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그러한 죽음의 냄새를 있는 힘껏 들이마셨기 때문이리라. 내 안의 어둠에 내가 손을 내밀었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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