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냉정과 열정사이>를 읽었을 때, 에쿠니 가오리가 쓴 것 보다 츠지 하토나리가 쓴 것이 더 마음에 들었다. 그때 처음으로 에쿠니 가오리의 작품을 접했는데 뭐랄까, 츠지 하토나리가 쓴 것에 비해 내용이 터무니없이 느리게 전개된다는 느낌을 받았다. 작품 자체가 아오이의 심리에만 맞춰져 있었기 때문일까? 먹고, 목욕하는 이야기 외엔 별 내용이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당시 에쿠니 가오리의 책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좀 지나치다는 생각도 했었다. 당연하게도 그녀의 책들은 내 관심에서 멀어지게 되었고.
이번에 읽게 된 그녀의 신작 <언젠가 기억에서 사라진다 해도>를 처음 보았을 때도, '에쿠니 가오리의 책이 또 나왔군... 왕성한 창작력은 알아줘야겠어...' 하면서 시큰둥했다. 그런데도 내가 이 책을 집어들었던 건, 그렇게 읽기 싫을 정도는 아니었고, 무엇보다 제목이 내 눈길을 잡아 끌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기억에서 사라진다 해도...' 그 뒤에 이어질 말이 사뭇 궁금해지는 제목이 아닌가. 분명 나는 그때 한창 멜랑꼴리한 기분에 젖어 있었거나, 그런 기분에 젖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제목 때문이었는지, 기분 탓이었는지 아무튼, 그녀의 신작을 읽고 난 뒤 생각이 바뀌었다. 내가 앞서 단점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반대로 그녀 소설의 충분한 매력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얼핏, 느린 듯, 사소한 듯 보이기도 하지만 그녀의 문체에는 어떤 쓸쓸함이랄까 아름다움 같은 것이 담겨있는 것 같았다. 물론 이 작품이 그렇게 뛰어나다는 생각이 들진 않지만, 한 작가를 너무 편견을 가지고 바라본 것 같아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여섯 편의 단편이 실린 이 소설집(연작소설처럼 구성되어 있다)에서 그녀는 열일곱 살 난 여고생들의 일상을 들여다 본다. 어떻게 보면 특별할 것 없지만 인간의 삶 전체를 놓고 볼 때 가장 특별할 수 밖에 없는 그 시절의 일상을. 여고생들의 이야기인데다 배경이 일본이라 처음에는 약간의 거리감이 있었다. 하지만 이 소설은 현재 일본 여고생들의 일탈과 그에 따르는 병폐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이 아나라 보다 소소한 일들에 주목하고 있었다. 다시말해, 누구나 거치게 되는 그 시절의 일상을 추억하고 보듬는 데에 더 관심이 있는 것이다. 어떠한 편견도 없고 가치판단도 내리지 않은 채. 제목도 '언젠가 기억에서 사라진다 해도' 가 아닌가. 뒤에 어떤 말이 올 것인가는 읽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지만 그게 무엇이든 간에 분명 긍정적일 말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추억하는 행위가 늘 그렇듯 조금은 쓸쓸해지겠지.
눈을 감고 열일곱의 나를 떠올려 본다. 열일곱의 나는 지금의 나를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내가 지금 열일곱의 나를 떠올리기도 힘든데... 언젠가 모든 것이 기억에서 사라진다 해도... 나는 그 말 뒤에 이렇게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슬퍼하지 않겠다고. 원망하지 않겠다고. 내 기억 속의 너 뿐만 아니라 네 기억 속의 나도 언젠가 사라지겠지... 그래도 슬퍼하지 않으리라,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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