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독서

나의 내면풍경 속으로 걸어들어가다(김형경, '사람풍경'을 읽고)

시월의숲 2005. 7. 10. 13:20

김형경의 <사람풍경>을 읽었습니다. 많은 분들에게서 좋다는 말을 들은터라 순수하게 읽고 싶은 욕망이 아닌 한번 읽어봐야겠군, 하는 생각이 더 작용했던 같기도 합니다. 물론 읽고 난 지금은 정말 잘 읽었구나, 하는 생각이지만.

 

처음 이 책의 제목을 봤을 때, '사람은 풍경으로 존재할 때 가장 아름답다'라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하지만 이 책은 풍경 속에 존재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린 것이 아니라, 그런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나 자신'에 대한 내면 풍경을 그린 것이었습니다. <사람풍경>이란 결국 <나의 내면풍경>인 것이었지요. 이 책은 일종의 여행기이기도 하지만, 그러한 자신의 내면에 있는 불안, 동일시, 투사, 의존, 공포, 자기애, 에로스, 분노 같은 감정들을 스스로 정신분석을 받았던 경험과 프로이드나 융 등의 심리학 서적을 탐독했던 지식을 바탕으로 풀어내고 있는 일종의 심리서이기도 합니다.

 

작가는 인간이 느끼는 여러 감정들을 무의식과 억압의 분출로 이해하려는 듯 합니다. 프로이드나 융의 서적들을 직접 읽어보진 못했지만, 작가가 말하고 있는 모든 이야기들의 바탕은 그것들에 맛닿아 있는 듯 했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작가는 오래되지 않은 과거의 한 시기에 정신분석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런 경험이 있음으로 해서 자기 자신의 무의식에 억압된 감정들과 마주하게 되었고 결국에는 그것들을 껴않을 수 있었던 것이겠지요.

 

하지만 모든 분노와 공포, 콤플렉스 등의 부정적인 감정들이 어렸을 적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형성되었다는 말은, 충분히 수긍이 가면서도 한편으로는 묘한 반발심이 들었습니다. 아니, 그렇다면 어렸을 때(기억나지도 않는 그 시절에) 한번 형성된 어머니와의 관계가 그 사람의 평생을 좌우한단 말인가! 그렇다면 인간은 모두(그렇지 않은 사람도 물론 있겠지만) 콤플렉스 덩어리에다가 억압된 무의식에 휘둘리는, 그렇게나 나약한 존재란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지요. 이런 생각을 만약 작가가 들었다면 아마 그것은 내 무의식의 어느 한 부분에 나약함을 싫어하는 나약함이 존재하고 있다고 말할지도 모르겠군요. 혹은 어렸을 적 어머니의 사랑이 부족했다고 말할 수도 있겠고.

 

이 책은 결국 작가가 낯선 곳을 여행하면서 맞닥뜨린 자기존재의 확인의 기록이며, 자기 내면에 억압되어 있던 여러 상처들을 자신 스스로 치유해나가는, 눈물겨운 정신적 투쟁의 기록입니다. 이 책을 읽음으로써 내가 늘 되내었던, '자신의 아픔은 결국 자신이 치유할 수 밖에 없다' 는 말이나, '나 자신을 사랑해야한다' 는 말의 의미를 더욱 확연히 제 가슴 속에 새길 수 있었습니다.

 

작가는 말합니다. 이 세상에 '정상'이라는 개념은 없다고. 모든 사람들은 병리적인 감정들과 건전한 감정들을 함께 가지고 있으며, 좀 더 나은 삶을 살려면 그러한 자신의 감정의 여러 측면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입니다. 아픔이 있다면 그 아픔을 회피하거나 누군가에게 의존, 혹은 투사하려 하지 말고 당당히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 자신을 존중하고 사랑하게 되는 길이겠지요. 그것이 또한 타인들과의 관계도 더욱 발전시키는 길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고.

 

이 책을 읽는 동안 마치 나의 내면 풍경 속을 걷고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내 무의식에 억압되어 있던 어떤 한 부분이 풀려나는 소리를 들은 것 같기도 하고, 급기야는 그것이 치유가 되는 듯한 착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자신과 만난 작가는, 그 앞에 놓인 자신의 삶을 더욱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용기가 생겼겠지요. 아직 저는 그러한 용기가 생겼다고 말할 자신이 없지만,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니 불현듯 그러한 용기가 생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창 밖에 내리는 비를, 슬픔이나 우울함이 아닌 그저 무덤덤함으로 바라 보고 있는 나자신이 느껴졌거든요. 그렇게 나를 이해하고,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만은 아닐지도 모른다고 저 빗방울이 말해주고 있는 듯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