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입한 인터넷 카페에서 <조서>에 대한 감상문을 읽었다. 이 책에 대한 어떠한 정보도 없던 내게 그 짧막한 감상문은 망설임 없이 이 책을 집어들게 할 만큼 매력적인 힘이 있었다. 지금은 잘 기억나질 않지만, 담배, 태양, 빛의 미메시스 등등의 단어들이 적혀 었던 것 같다. 때론 짧고도 인상적인 감상문이 책을 선택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고, 나도 그렇게 쓸 수 있을까 잠시 생각했다.
사실 그 추상적인 감상문을 읽을 때도 약간의 짐작은 했었지만, 이 책은 무척이나 철학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었다. '정신병원 또는 군대에서 탈출했을지도 모르는 한 남자의 이야기' 라는 흥미로운 부제가 붙은 이 소설은 아담 폴로 라는 의미심장한 이름의 주인공이 버려진 별장에서 홀로 살아가면서 일어나는 일들을 그리고 있다. 그에게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은 소설이라는 장르에서 흔히 나타나는 '사건'이라고 불릴 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산책을 하고 태양 광선 아래에서 옷을 벗고 있는 일, 개를 따라다니는 일, 자신이 강간한(?) 미셸에게 편지를 쓰거나 때론 만나는 일, 집엔에 있는 쥐를 죽이는 일일 뿐이다.
여기 이렇게 그가 하는 일을 나열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그것은 특별한 사건도 아니고 위기나 클라이막스도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이 소설에서 그런 행위들이 특별해지는 것은 바로 화자의 서술방식 때문이다. 소설에서 아담 폴로는 '그'로 지칭되는데, 그를 그로 부르는 화자(아마 작가일 것이 분명한)의 서술방식, 즉 사물이 가지고 있던 기존의 관념들과 언어들을 새롭게 만드는 것, 뭔가 다르게 표현하는 것, 좀 더 본질적인 것에로 다가가려는 것, 전체적으로 사변적이고 추상적이지만 그 장면 묘사는 굉장히 극사실주의적인 것 등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제목도 조서(調書)가 아닌가. 다름아닌 인간에 대한 탐구서 혹은 조사서. 그것을 그는 정신병원 또는 군대에서 탈출했을지도 모르는 한 남자를 통해 드러내 보이고 있다.
쉽게 읽을 수 없었다. 거대한 생각과 거대한 문장. 군데군데 시점의 혼란과 관념적이고 철학적인 견해, 편지글과 신문기사의 삽입, 색다른 묘사 등을 다 따라잡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몇 번이고 책을 덮었다 펼쳤다 했다. 문명 이전의 원시적이고 신화적인 상태의 인간, 존재하는 그대로 존재하는 것.... 이것이 결국 그(아담 폴로 혹은 르 클레지오 자신)가 말하고 싶어하는 것인 줄은 알겠는데 그것에 이르는 과정이 고통스러웠던 것이다. 그래도 마지막, 아담 폴로가 결국 정신병원에 갇히고 학생들이 그를 인터뷰하러 왔을 때의 대화 장면은 상당히 흡인력이 있었다. 결국 이 소설의 주제는 그 대화에 들어있지 않나 생각된다.
인간에 대한 짧지만 긴 조서였다. 읽고 나서 그(카페에 감상문을 쓴)가 왜 담배가 피고 싶다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물론 나는 담배를 피우지 않지만, 이 소설만큼 담배가 필요한 소설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흔해빠진독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윤대녕, 『눈의 여행자』를 읽고 (0) | 2007.07.15 |
---|---|
윤성희, 『감기』를 읽고 (0) | 2007.07.11 |
김경욱, 『누가 커트 코베인을 죽였는가』 (0) | 2007.06.07 |
주제 사라마구, 『눈먼 자들의 도시』를 읽고 (0) | 2007.05.28 |
파트릭 모디아노, 『슬픈 빌라』 (0) | 2007.05.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