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질 않는다. 아마도 대학교 1학년 때였지 싶다. 서점에서 이 책을 발견했을 때 무언가 나를 끌어당기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것은 비단 나만이 느낀 감정이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나처럼 제목만 보고 이 책을 집어 들지 않았을까? 그만큼 이 책의 제목은 사람을 매혹시키는 무언가가 있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니!
그렇게 제목에 매료되어 이 책을 사놓고 한 번은 읽었던 것 같은데… 하지만 의심스럽다. 정말 내가 끝까지 읽었던가? 소설의 중간중간에 연필로 줄을 쳐 놓은 것을 보면 분명히 읽었던 것 같은데, 그게 기억나질 않는다. 아마도 그때(줄을 치면서 읽었을 때)는 소설의 내용이 무엇인지, 작가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이해하지도 못한 채 꾸역꾸역 글자들만 읽어나갔던 것 같다. 그래놓고서 밑줄을 그어놓았다니!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건 참을 수 없는 독서의 가벼움이 아닌가!
그렇다고 이번에 다시 읽은 이 소설을 내가 완벽히 이해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닐 것이다. 다만 그때보다는 조금이나마 이해하기가 수월했다는 추측만 들 뿐. 소련이 유럽을 침공하여 그 세력을 넓혀가던 시절을 배경으로 체코의 네 남녀에 관한 이야기를 철학적이고 때론 유머러스하게 펼쳐놓은 이 소설은, 시대적 상황과 철학적 사유를 결합해 놓은 소설들이 그렇듯, 그리 쉽게 읽히지만은 않았다.
무거움을 상징하는 테레사와 프란츠, 가벼움을 상징하는 토마스와 사비나. 이들을 통해 작가는 삶의 이중성, 영혼과 육체, 무거움과 가벼움 등을 고찰하고 있다.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에 의해 우리의 삶이, 역사가 영원히 되풀이 된다면 우리의 존재는 한없이 무거운 것이 되겠지만, 우리의 삶은 단 한 번뿐이므로 그 한 번뿐인 삶을 사는 우리들은 한없이 가벼운 존재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렇듯 가벼운 존재들이라면, 우리의 존재가 한없이 가벼운 것이라면 우리는 무엇 때문에 영혼을 말하고, 무거움 때문에 괴로워하고, 공산주의를 타도하자고 외치며, 질투 없는 사랑을 하지 못하는 것인가. 그것이 책을 읽는 동안 계속 나를 따라다니며 괴롭히던 물음이었다. 우리가 무거워지려 하면 할수록, 이상을 추구하려하면 할수록 그 끝에는 파멸만이 있다는 말인가. 테레사와 토마스의 비극적인 말로처럼?
작가는 허무하게도 하지만 당연하게도 그에 대해 어떠한 명쾌한 대답도 해주지 않는다. 삶이 그런 것처럼, 작가는 네 남녀를 통해 죽는 순간까지 이리 부딪히고 저리 부딪히는 인간들의 삶을 탐구하고 있을 뿐이다. 어쩌면 우리는 끝까지 우리가 가벼운 존재들임을 자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괴로워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지 않다면 사비나처럼 끝까지 가벼운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 그에 대한 해답이 될 수 있을까? 배반에 배반을 거듭하고 급기야는 배반을 배반하면서, 집착하지 않으면서, 섹스는 하되 사랑은 하지 않으면서?
다시, 작가가 소설의 맨 처음 제기했던 문제로 돌아가서, 영원히 살 수 있고, 우리의 역사가 끝없이 되풀이 된다면 우리의 존재는 무게를 지니게 될 것인가. 파르메니데스처럼 무거운 것은 악이고 가벼운 것은 선인가. 혹은 베토벤처럼 무거운 것이 긍정적인 것일까. 우리는 가벼워져야 하는가, 무거워져야 하는가. 혹은 가벼운 존재일 수밖에 없는 것인가. 작가는 끊임없이 의심하고 생각한다. 하지만 결국 작가는 인간이란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존재라는 사실, 그 때문에 괴로워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우리는 가벼워져야 하는가, 무거워져야 하는가? 이런 어리석은 물음 앞에 일단은 우리 존재가 한없이 가볍다는 것을 먼저 깨달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완성될 수 없어 무용한 초벌그림처럼.
'흔해빠진독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방현석, 『랍스터를 먹는 시간』을 읽고 (0) | 2007.11.29 |
---|---|
정이현, 『달콤한 나의 도시』를 읽고 (0) | 2007.11.23 |
폴 오스터, 『뉴욕 3부작』을 읽고 (0) | 2007.11.14 |
한강, 『그대의 차가운 손』을 읽고 (0) | 2007.11.05 |
이승우, 『생의 이면』을 읽고 (0) | 2007.10.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