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독서

최용건, 『라다크, 그리운 시절에 살다』, 푸른숲, 2004

시월의숲 2007. 12. 6. 23:19

언제인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리 오래되지 않은 어떤 날에 나는 이 책을 한 신문의 책 리뷰란을 통해서 알았다. 그리고는 한동안 잊고 있었는데, 며칠 전 도서관에서 처음 이 책을 본 순간 아, 하는 알 수 없는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무언가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구나 하는 안타까움과 반가움이 한데 뒤엉켜 한순간 나를 사로잡았던 것이다. 라다크라는 지명에서 풍기는 이국성과 더불어 눈부시게 하얀 설산이 떠올랐기 때문일까?

 

<화가 최용건의 라다크 일기>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말 그대로 최용건이란 화가가 인도 라다크 지방에서 1년 정도 살면서 쓴 일기였다. 라다크는 히말라야 산맥이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뻗어 있는 인도 북서부, 파키스탄 접경 지역에 자리 잡고 있는 전설의 불교 왕국으로, 모든 문물이 티베트와 닮아 '작은 티베트'로 불리기도 하는 곳이라고 한다. 그런 라다크에는 왜?

 

내가 처음 이 책을 접했을 때 작가가 문명에서의 삶을 버리고 그야말로 구도자의 심정으로, 혹은 자연에 가까이 다가가고자 하는 바람으로 라다크에 들어갔다고 생각했다. 마치 원시 종족의 삶을 이해하하기 위해 그 종족의 추장과 결혼까지 한 인류학자 마가렛 미드처럼 말이다. 물론 작가의 열정과 목적이 그녀의 그것과 같지는 않을테지만 적어도 나는 그가 라다키들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 직접 그들이 하는 일을 하고 그들이 사는 방식으로 생활하리라 기대했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그러한 내 기대가 너무나 터무니 없는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이 비유가 맞을 지는 모르겠지만, 오페라 가수에게서 판소리가 나오길 바란 격이라고 해야할까. 이 책은 그러한 인류학적인 견지에서가 아니라 단순히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의 생활, 그러니까 소비지향적이고 물질만능적인 도시 생활에서 벗어나 자연과 좀 더 친밀해지고자 하는 작가의 조금은 소박한(?) 욕심에서 나온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음엔 조금 맥이 풀리는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책을 읽어나가면서 그러한 생각은 히말라야의 눈이 녹듯 점차 사라졌다.

 

화가나 소설가 등의 예술가들이 새로운 영감을 얻으려고 다른 나라를 여행하는 일이야 흔히 있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모두 단발성의 여행으로 끝나는 반면 이 책의 작가는 1년이나 그곳에서 살았다. 그것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히 가치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그곳에서 살면서 라다키들의 생활을 이해하려고 노력했고 좀 더 가난하게 살고자 애썼다. 몸소 자발적 가난을 실천했다고 해야하나. 물론 그는 그곳에서 농사가 아닌 그림을 그렸지만, 농사꾼이 아닌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 아닌가. 그런 그의 모습에서 어느날 모든 것을 버리고 오로지 그림을 그리기 위해 타히티로 떠난 고갱이 얼핏 떠오른 것은 지나친 연상일까?

 

아무튼 그의 일기는 재미있었다. 라다키들의 삶을 속속들이 알기는 어려웠지만 그래도  책을 읽으면서 그들의 인상이 참으로 푸근하구나 생각했다. 책 중간중간에는 그곳에서 직접 생활하면서 그린 그림들이 함께 실려 있어 보는 재미까지 주었다(개인적으로는 사진이 실려 있길 바랐지만 뭐, 그림도 나름 분위기 있는 것 같다). 먹 특유의 농담과 힘있고도 독특한 필치로 인해 기존의 동양화와는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그림이었다. 글을 읽는 재미와 그림을 보는 재미가 두루 있었다.

 

하지만 한가지, 라다키들의 일상을 너무 미화한 것은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이방인의 입장에서, 히말라야의 압도적인 풍광앞에 어쩔 수 없이 드는 외경심과 인간존재의 미미함이 그로 하여금 라다키들의 삶을 마냥 욕심없이 자족하며 행복하게 사는 것으로만 보이게 한 것은 아닌지. 또한 그는 행복을 찾으러 라다크에 갔다고 하지만 과연 행복이란 것이 어떤 곳에 가야만 찾을 수 있는 것인지.

 

하지만 또 이런 생각도 든다. 행복이란 자신 안에 존재하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라도 그런 여행은 필요하지 않겠냐고. 여행이란 그 자체로 이미 아름다운 것이 아니겠냐고. 그는 이미 몇 천미터 되는 높이의 고원에 살고 있는 라다키들을 보았으며, 그 험준한 설산들과 쏟아져 내릴 듯 빛나는 밤하늘의 별을 보았던 것이다. 그러한 것들을 본 순간 그는 이미 예전의 그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 때론 인간들을 떠나 자연의 원시 속으로 들어가 보는 일도 필요할 것이다. 사실 책을 읽는내내 그가 정말로 부러웠다. 아~ 라다크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