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은 흔히 식물하면 수동적이고 정적이며 어딘가 약해보이는 이미지를 떠올린다. 그것은 탐욕적인 이미지를 가진 동물성이라는 단어와 대비되어 문학에서 빈번히 쓰이고 또 마땅히 그렇게 생각되어 왔다. 하지만 이승우의 장편소설인 <식물들의 사생활>에서의 식물은 결코 동물성과 대비되는 의미로서가 아닌, 불꽃처럼 타오르는 욕망의 현현으로서의 식물의 속성을 보여준다. 즉 동물성의 다른 이름으로서, 식물들이 가진 욕망으로서 혹은 좌절된 사랑의 화신으로서의 식물을 보여주는 것이다.
기존에 내가 생각하고 있던 식물성과 동물성의 이중적 인식을 와해시키는, 놀라운 소설이었다. 욕망이란 결코 동물들만의 전유물은 아니라는 엄연한 사실을 새롭게 인식시켜준 것이다. 작가 후기에서 작가는 언젠가 ‘굵은 소나무의 줄기를 안으로 파고들 것처럼 끌어안고 있는, 매끄럽고 가무잡잡한 피부의 여체를 연상시키는 때죽나무’를 보았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 소설은 그 나무들에게서 비롯되었다. 서로가 서로를 끌어안고 있는 나무들로부터 작가는 인간들 사이의 좌절된 사랑을 보았고, 그러한 좌절된 사랑의 신화적 완성을 보았다.
소설 속에서 소나무는 우현이라는 인물로, 소나무를 감싸고 있는 때죽나무는 순미라는 인물로 다시 태어났다. 이루어지지 않는 그들의 사랑을 지켜보는 인물은 바로 우현의 동생인 기현이라는 인물이다. 기현의 시점으로 서술되는 이 소설은 그들 세 명과 더불어 기현의 어머니와 그녀의 첫사랑, 그리고 아버지, 이렇게 또다른 세 명의 인물들과 서로 묘하게 대칭적 관계를 이루며 소설 속 갈등의 두 축을 형성하고 있다. 모두들 저마다 다른, 자신만이 가진 방식으로 사랑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소설은 사랑에 관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장애인이 된 우현이라는 인물을 등장시킴으로써 그를 통해서 장애인이 직면하게 되는 성욕에 대해서 생각하게 하며, 기현이 형에 대해 저지른 잘못을 통해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죄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한다. 두 다리가 절단되어 불구가 되었음에도 여전히 남아있는 욕망과 사랑의 찌꺼기. 참으로 난감한 그것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식물이 되어버린 우현의 몸뚱아리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지 않는 내면의 동물적 욕망 사이에서 그는 결국 나무가 되길 원한다. 수많은 신화에 등장하는 나무들이 모두 좌절된 사랑의 화신이듯 자신도 그렇게 되고 싶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그것이, 나무가, 식물이, 절실한 사랑의 상징이 된다.
때로 뿌리가 드러난 거대한 나무들을 보고 있거나 벼랑 끝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자라고 있는 나무들을 볼 때, 혹은 뽑아도 뽑아도 어느새 날아와 뿌리를 내리고 있는 잡초들을 볼 때 나는 그들의 끈질긴 생명력에 놀라곤 한다. 소설을 읽고 그러한 나무들의 욕망을 생각했다. 땅속으로, 허공으로 촘촘히 뻗어가는 그 욕망의 뿌리와 가지들을. 그러한 식물들, 나무들을 좌절된 사랑의 화신으로 본 작가의 상상력이 놀라웠다.
소설을 읽으면서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욕망에 한없이 비참해지면서도 한줄기 햇살이 비치는 것 같은 결말에 이르러서는 마음이 한결 따스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사랑에 관해서 절망적일만큼 진지하고 비참해질 정도로 서글프며 눈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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