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이승우, 《그곳이 어디든》, 현대문학, 2007.

시월의숲 2008. 10. 27. 21:41

자연의 운동은, 엄격한 규칙과 질서를 내부에 숨긴 채 무질서와 무작위의 외양을 보인다. 반면에 사람의 손이 닿으면 아무리 무작위로 어지럽게 흩어놓은 것 같아도 어딘가 정연한 질서의 외양이 나타난다. 자연의 운동은 자연스럽지만 자연을 흉내 낸 인간의 운동은 자연만큼 자연스럽지 않다.(133~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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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이 날뛰는 한 누구도 평화로울 수 없는 법이다. 날카롭게 벼려질수록 성가신 것이 감각이다. 죽은 자가 왜 평화로운지 말 할 수 있다면 세상살이가 왜 성가신지도 대답할 수 있다. 감각은 살아 있다는 징표이면서 모든 불화들의 근거이다. 평화로운 자는 감각을 잃거나 버린 자이다. 살아 있는 채로 감각을 잃거나 버리는 일이 가능한가? 하고 질문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 아니다. 그러나 그 질문에 답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기 쉽다. 왜냐하면 어느 쪽으로 답하든 그 내포하는 바는 같기 때문이다. 감각 없이 살아가는 것이 가능하냐는 질문에 대해 불가능하다고 답하는 것은 감각의 부재와 죽음을 동일시한 결과이다. 반대로 그것이 가능하다고 답하려면 죽음을 사는 삶을 전제해야 한다. '죽음을 사는 삶'은 죽었기 때문에 삶이 아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기 때문에 죽음이 아니다.(235~2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