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배수아, 《부주의한 사랑》, 문학동네, 2003.

시월의숲 2008. 11. 15. 11:26

……어쩌면 기억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고, 이 세상 모든 과거는 내 그림자에 비쳐지는 희미한 거울의 뒤편일 수도 있다.(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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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몰랐다. 내가 언제나 밤이면 쓸쓸하게 바람 부는 어두운 강가에 홀로 서 있었다는 것, 그리고 발밑에서부터 서서히 다가오는 지진. 기억 이전에 있는 고통스러운 사랑 안으로 깊이 깊이 빠져들고 있었다는 걸.(1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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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것을 모두 다 알고 있다. 누구도 나에게 말해준 사람은 없었다. 사람들은 도리어 나에게 뭔가를 숨겼다. 은밀하고 어두운 이야기가 스며 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에 내가 아는 사람들은 지금은 모두가 다 뿔뿔이 흩어져버렸다. 살아 있는지 아니면 죽었는지 알 수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꿈을 모두 기억할 수 있다면, 사람들은 더이상의 신비를 바라지 않을지도 모른다. 잘 살기 위해서, 행복해지려고 꿈을 기억하려 하는 것은 아니다. 어두운 신비에의 욕망이 잠자고 있어서, 사람들은 기억하지 못하는 기억에 몸을 던진다……(1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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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흐른 다음에 아픈 가슴을 안고 나는 죽게 되리라. 아직도 차가운 강물 속에 있는 내 남자아이의 머리칼을. 크토록 부주의하게 빠져들어갔던 내 생의 깊고 어두운 강물을.(1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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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이들고 지쳤다. 바람이 나에게 아무것도 말하지 말기를 바라며, 이제는 꿈속에서도 아무것도 알 수가 없고 이제 조용히, 조용히 죽어가기만을 바란다. 더이상의 일은 이제 생에서 일어나지 않으리라. 반드시 그러리라.(176쪽)

 

 

- 배수아, 《부주의한 사랑》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