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배수아, 《내 안에 남자가 숨어있다》, 2000, 이룸.

시월의숲 2008. 11. 2. 21:13

우리는 성적으로 명랑쾌활한 이탈리아인도 아니고 바커스의 축제에 참가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비록 은밀한 감동에 떨었던 순간이 있었다 할지라도 그 감동을 우리 인생의 전면에 내세우지는 못한다. 그러나 왜 언제나 반드시 완전무결해야 하는가. 또는 완전무결을 지향해야 하는가. 다른 사람을 통해서 인정받을 필요가 없는 부분에서는 자유롭게 비위생적이 되거나 비상식적이 되어도 된다. 그것은 완벽한 기호의 문제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조차 털어놓고 용서를 바랄 필요도 없다. 혹 그것 때문에 죄의식과 수치심으로 고통을 받는다면 그것은 그의 몫이다. 그러나 그대, 고통 하나 없는 완전한 인생을 진정 원하는가? 상처 없는 관계를 원하는가? 하나의 비밀도 가지지 않기를 원하는가? 죽을 때까지 마음 아플 일이 없기를 바라는가? 흠집 하나 없는 완벽한 인격을 진정 원하는가? 진정인가?(55~58)

 

 

*

 

 

객관적인 아름다움은 누구나 찬미하지만 누구나 오래 가질 수는 없는 것. 그러나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한 사람, 당신만은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 부정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을 사랑하는 또 다른 내밀한 형태일 뿐이다.(60)

 

 

*

 

 

시간이 흐르면 연인의 마음은 변하고 연인의 손길은 둔감해진다. 그러나 당신 안에 있는 나르시스는 그렇지 않다. 그에게 당신은 사랑의 묘약으로 취해 버린 상대, 영원한 이상의 대상, 배신하지 않는 그리움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는 당신이 더 이상 아름답지 않아도 당신을 사랑한다. 당신 안에도 반드시 그런 나르시스가 살고 있을 것이다. 그는 속삭일 것이다. 당신, 아는가? 당신은 정말 소중하고 아름다운 사람이다. 그리고 언제나 그럴 것이다.(61)

 

 

*

 

 

글을 다루는 사람은 더욱 잘 알 것이다. 언어란 사용할수록 얼마나 감옥이 되는가를. 말을 꺼낼수록 멀어져만 가는 나. 내 머릿속의 폭풍과 석양은 내가 태어나 얻은 단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어서, 너에게 꺼내 보여 줄 수가 없다. 혹 그럴듯해 보일지라도 그래서 노래가 되어 나오더라도 이 세상에 나온 이상 그것은 이미 본질이 아니다. 정신의 울타리가 언어라면 감각의 벽은 몸이다. 나는 내가 느끼지 못한 세상은 영원히 알 수가 없다.(144)

 

 

*

 

 

인간이 진화할수록, 아무리 좁은 공간을 나누어 생활하더라도 사람과 사람의 사이는 멀어진다. 원하지 않아도 어쩔 수 없다. 그 모든 것을 인정하기에는 노력이 필요할 수도 있다. 가까운 사람이 겪는 클라이맥스와 고통과 좌절을 우리는 모른다. 설사 설명한다 할지라도 알 수 없다. 우리 모두의 몸 안에는 서로 다른 시간의 시계와 달력이 들어 있어, 타인 안의 시간과 계절을 알 수가 없다. 진정 일생을 통해 체험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 뿐이다. 다른 모든 것은 단지 이해하고 견디는 것에 불과하다.(145)

 

 

*

 

 

생명은 짧고 육체의 젊음은 잠깐이다. 시간이 영원하다면, 불멸이라면, 나이 들고 늙어 갈 운명이 아니라면, 영원히 젊다면, 이렇게 유한한 몸이 아니라면, 그래도 한 사람을 내 생명처럼 사랑할까. 사랑에 그토록 간절함이 있을까. 불안한 듯이 꼭 잡은 두 손을 결코 놓기 싫은 그런 존재가 있을까. 한 사람에게 구속됨으로써 얻는 충족감이 있을까. 같이 마주 보며 늙어 갈 동반자가 있음이 그토록 감사할까. 언제나 변함없고 믿을 수 있는 그런 다정한 존재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할까. 아마 상당히 다른 의미가 될 것이다. 사람이 연인을 그리워하는 것은 서로 남자고 여자이기 때문만도 아니고 잃어버린 반쪽이라서 그런 것만도 아니고 종족 보존을 위해서만도 아니다. 도저히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너무나 유한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므로 당연히 나는 바로 당신이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식의 위안의 말은 안 믿는 편이다. 대상이 절대적이지 않다. 존재의 불안이 고독을 만들고 그래서 필요한 연인은 이미지로 남는다. 바로 그()는 한때 나의 연인이었다는 이미지다.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149~152)

 

 

*

 

 

어쩌면 사람의 욕망은 너무나 무한대여서 스스로 사이클을 갖지 않으면 그 증폭되는 힘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죄의식이란 장치가 필요한 건지도 모른다. 몸이 사라진다면 욕망도 사라질 것이다. 그러면 영혼도 소멸하고 에고도 더 이상 그 추악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할렘가처럼 우리 인생에서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모든 죄의식도 사라질 것이다. 인생은 봄이 될 것이다. 나는 비록 무지하지만 수행이란 이런 경지에 오르기 위한 과정이 아닐까. 그런 경지에 오르면 무엇을 얻게 되는가, 왜 굳이 그런 경지에 오르기 위해 고생하느냐고 되묻는다면 할 말은 없지만 말이다.

욕망이 사라지는 그 순간, 생각하면 조금 슬프기도 하다. 왜냐하면 욕망과 함께 영원한 내 친구였던 내 몸과 이기적이고 비합리적이고 공명정대하지 못했던 나를 언제나 변명해 주었던 나의 아이덴티티, 에고가 사라져 버리고 사람들이 의미 있게 생각하는 영혼도 날아가고 내 은밀한 부끄러움, 수치심이나 죄의식도 남지 않을 것이다. 마치 핵전쟁이 일어난 것 같다. ! 인생의 봄과 핵전쟁이 같은 모습으로 연상된다니, 과연 무엇이 정말일까. 아주 오래 전에, 누군가가 말했었다. 육체가 없으면 고통도 없다. 그러니 아가야, 그날 이후를 겁낼 것은 아무것도 없단다,라고.(154~1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