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뿐이고

시월의숲 2008. 12. 31. 22:40

꼭 무언가를 써야겠다고(이렇게 표현하고 싶다) 생각한 건 아니었다.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2008년의 마지막 날이었을 뿐이다. 정신을 어디다 놓고 다니는지 모른채 하루를 보냈고, 퇴근 길에 쓰레기더미 옆에서 먹다버린 통닭을 아작아작 씹고 있는 주인 없는 개의 모습을 보고 배가 고파왔을 뿐이다. 오늘은 무척이나 추웠고, 내가 아는 몇몇 사람에게서 새해 인사문자가 왔다.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같이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인사를 했다. 도대체 무슨 복을 받으라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복은 좋은 거라니까.

 

아, 그리고 아버지의 전화도 받았다. 물론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이야기였다. 전혀 새로울 것 없는 나날들의 연속이지만, 하루하루, 한달한달, 일년일년을 숫자로 나누어놓고 무슨 날이 올때마다 식싱하기 그지없는 기념인사를 하는 걸 보면, 사람들은 이미 시간의 속절없음을 현명하게 속절없어 하는 능력을 타고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만큼 흘러왔을 때에만 내가 이만큼이나 흘러왔음을 깨닫게 되는 이상야릇한 시간감각이 오늘은 무척이나 선명하게 느껴진다. 아마도, 한 해의 마지막 날이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나는 오늘도 어제처럼 보낼 뿐이고, 내일도 오늘처럼 별 탈없이 보낼 수 있었으면 좋겠고, 새해 소망이 있다면 오늘처럼 평온한 나날이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머리를 쥐어뜯게되는 외로움이나 이불을 둘둘말게되는 쓸쓸한 감정이 친구처럼 느껴지는 것은 속절없는 시간이 주는 최대의 선물이라 생각하면서 나만의 송년회를 치른다. 내년에 만나자고,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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