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유성용, 《여행생활자》, 갤리온, 2007.

시월의숲 2009. 1. 3. 22:14

여행은 모순이다. 자유 속에서 생활을 꿈꾸는 아둔한 우여곡절이다. 여행의 길은 그저 멀어서 먼 길이 아니고 길을 알면서도 스스로 나아가서 길을 잃고, 멀리 돌아가야 하는 먼 길이다. 그 길은 절대의 빛으로 이루어진 눈부신 천국으로 가는 길이 아니고 동서남북이 없는 눈부신 환한 빛 속에서 어둠을 조적해서 쌓아가는 제 속의 길이다.

여행은 드러냄이 아니고 숨김이다. 함부로 생활의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고 커다란 비밀을 제 속에 품을 때까지 제 몸을 숨기면서 가야 하는 길인지도 모른다.(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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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깃불을 처음 본 가난한 소년은 그날따라 별들이 낮게 떠 있다고 생각했다. 가난한 시인의 유년시절을 떠올려 봐도 별들이 왜 아름다운지, 가난이 왜 아름다운지 나는 설명할 바가 없다. 하지만 나는 늘 그들 곁에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이 세상의 궁색해진 뻔한 행복 말고 우리가 무언가 다른 꿈을 꾸어야 한다면, 가난 속에서 나는 그것을 시작해야 할 거라는 막연한 생각을 한다. 가난의 고통은 세상의 한가운데 있지만, 가난은 또한 지금 이 세상의 한계를 일깨우는 '세상의 끝'에 있다. 그곳에서라면 다른 세상으로 나가는, 세상 끝 감각을 놓치지 않을 수 있을지 모른다.(180~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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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자주 인생의 여정에 비유되지만, 여행의 끝은 모든 것의 끝이 아니고 다만 여행의 끝이다. 말하자면 여행은 액자소설처럼, 생 속의 생이다. 여행하다 보면 자주, 한 생에서 여러 생을 살고 있는 느낌이 든다. 더욱이 생이 꿈이라면, 여행은 꿈속의 꿈인 셈이다.(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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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떠나는 자가 되었을까.

그리고 이제 와서 내 입으로 할 수 있는 몇 마디 말은,

상처란 치유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만 나의 자리를 상처에서 비켜 다시 마련하는 일.

이 말을 의심하지 마라. 그 속에 혹은 그 밖에서 치열함을 묻지도.(3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