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김연수, 《밤은 노래한다》, 문학과지성사, 2008.

시월의숲 2009. 1. 27. 18:43

이제는 알겠다. 사랑은 여분의 것이다. 인생이 모두 끝나고 난 뒤에도 남아 있는 찌꺼기와 같은 것이다. 자신이 사는 현실 속에서 사랑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는 『테츠트보』라든가, 니콜라예프스크 같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낯선 단어들 속에서, 열병에 걸린 듯 현기증을 느끼며 사랑한다. 한 번도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맛보지 못하고, 만지지 못했던 것들이, 우리를 환상 속으로 이끄는 그 모든 낯선 감각의 경험들이 사랑의 거의 전부다.(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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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어디 있나요? 제 말은 들리나요? 어쩌면 이건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편지겠어요.'…… 그 한 장의 편지로 인해서 그때까지 아무런 문제도 없이 움직이던 내 삶은 큰 소리를 내면서 부서졌다. 그때까지 내가 알고 있었고, 그게 진실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세계가 그처럼 간단하게 무너져 내릴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건 이 세계가 낮과 밤, 빛과 어둠, 진실과 거짓, 고귀함과 하찮음 등으로 나뉘어 있다는 사실을 그때까지 나는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게 부끄러워서 나는 견딜 수가 없었다.(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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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이 이 잠에서 영원히 깨어나지 않으면 왠지 무척 행복할 거라는 느낌이 드는군요. 동시에 만약 이 잠에서 영원히 깨어나지 않으면 왠지 한층 슬플 거라는 느낌 또한 듭니다'라는 문장으로 끝나는 소설을 읽은 적이 있다. 그 소설을 쓴 작가는 이런 시도 남겼다. '우리는 서로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다. 너와 나는. 너는 자신의 세계에 살고 있어 행복하다. 나도 자신의 세계에 만족해.' 행복은 자신이 속한 세계 안에 갇혀 있다. 슬픔의 냄새는 그 세계 밖깥에서 번져온다. 행복하기만 하다면 삶은 거짓이라고 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 냄새만은 견딜 수 없었다.(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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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뭔지도 모르는 자이니 증오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는 건 당연하겠지. 사랑도 마찬가지지만, 증오 역시 감정만으로는 존재할 수 없지. 사랑이든 증오든 오직 행동으로 실현될 때만 존재할 수 있는 거야. 네 몸으로 사랑할 때, 그게 사랑이야. 입으로 아무리 떠들어봐야 소용이 없어. 뭔가를 증오한다면 얼마만큼 증오하는지 네 몸으로 보여봐. 사랑한다면 사랑을 하고, 증오한다면 증오를 하란 말이야. 하지만 머릿속으로나, 그 잘나나 혀가 아니라 너의 신체로 보여달란 말이야. 세상 모든 사람들이 똑똑히 알 수 있도록."(88~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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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열망은 그 열망이 이뤄지는 일과 아무런 관계가 없으리라. 열망으로 이뤄지는 일은 하나도 없다. 열망은 결코 원인이 아니다. 열망은 그 자체로 결과이리라. 열망은 열망하는 그 순간에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뿐이다.(343~344쪽, 작가의 말에서)

 

 

 

- 김연수, <밤은 노래한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