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독서

요시다 슈이치, 『열대어』, 문학동네, 2003.

시월의숲 2009. 12. 28. 18:49

 

 

 

어떤 소설가의 책을 한 번이라도 읽었다면, 그것이 나중에 그 사람의 또다른 책을 고르게 하는 힘으로 작용할 수 있는가. 물론 그럴 것이다. 그 작가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고, 특히 일본소설에 그리 흥미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어쨌거나 인간은 망각하는 동물이므로, 과거에 읽은 한 작가의 소설이 줄곧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기란, 어지간히 인상이 깊지 않고서는, 참으로 힘든 일일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과거에 내가 그의 소설을 읽었으며, 구체적이진 않더라도, 희미한 기억이나마 어렴풋이 떠오른다면, 그리고 그것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면, 그건 분명 그 사람의 책을 고르는데 얼마간의 힘으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무척이나 당연한 일인듯 싶다가도 때때로 무척이나 신기한 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 사람 중의 하나가 바로 요시다 슈이치다. 『퍼레이드』, 『일요일들』에 이어 세 번째로 만나는 『열대어』까지. 그의 소설은 드문드문 내 시야에 들어왔다 사라졌고, 나는 드문드문 그의 소설을 읽었다. 그의 소설은 어떤 분위기였지? 줄거리는? 이미 망각의 강을 건너버린 내 기억 때문일까. 불현듯 나는 그의 소설이 읽고 싶어졌다.

 

요시다 슈이치의 『열대어』는 모두 세 편의 중단편이 들어있는 소설집이다. 표제작인 <열대어>에서부터 <그린피스>, <돌풍>, 이렇게 세 개의 소설로 이루어진 소설집. 하얗고 파란 표지 위에 열대어 모양의 그림이 시선을 잡아끈다. 오랜만에 읽은 요시다 슈이치의 소설은 예전에 읽었던 그의 소설이 어떠했던가, 새록새록 떠올려주었다. 마치 수조 속 열대어의 숨결처럼 말이다. 『열대어』는 지극히 일상적인 삶을 살지만, 결코 일상적이라고 말하기 꺼려지는 인간들을 그려보인다. 일상 속에 잠복해 있는, 폭력성과 불안 같은 위태로운 감정을 일상이라는, 아무런 문제 없이 잘 굴러가는 듯 보이는 쳇바퀴 위에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열대어>의 다이스케, <그린피스>의 '나', <돌풍>의 닛타는 모두 평범하기 이를데 없는 인간들이다. 그들은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에게 자신의 상냥함으로 인해(!) 상처를 주지만, 자기 자신만은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른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누군가에게는 지극히 폭력적인 사람이 된다. 그것을 일종의 병이라고 해도 무방하리라. 병에 걸렸지만, 자신은 병에 걸린 사실조차 모르며,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치유대상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물 흐르듯 흘러가는 일상 속에 그렇게 불가해하고 폭력적이고, 병적인 무언가가 존재하고 있다니. 그리고 그것이 다름아닌 상냥함과 배려, 사랑이라는 달콤한 탈을 쓰고 있다니.

 

평범한 우리들은 바로 그 평범함 때문에 비로소 평범하지 않게 되는 건지도 모른다. 그리고 평범하지 않음으로서 우리는 평범할 수 있게 되는 것이고. 소설 속에 등장하는 비일상적이지만 일상적인 사건들, 탁아소 아이들을 인질로 잡고 협상을 요구하는 인질범이나 언젠가 해외여행을 갔다가 오랜 시간 납치된 경험이 있는 남자, 자신의 연인에게 통조림통을 던져버리는 남자, 상대방의 외침(여기서 날 구해주세요, 살려주세요)에 귀기울이는 척하면서도 결국은 외면하고 마는 남자, 이런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사건들이 바로 평범과 그렇지 않음을 구분할 수 없게 하는 것이다. 그게 바로 일상이라니까, 라며 태연하게 말하고 있는, 열대어처럼 무표정한 일상의 얼굴이 보이는 듯하다. 우리의 내면 저 깊은 곳에 들어있는 감정은 그렇게 위태롭고 폭력적일 수 있다. 텔레비전에 등장하는 연쇄살인마는 태어날 때부터 연쇄살인마가 아니다. 사회학적인 고찰은 접어두고라도, 우리는 모두 잠재적 범죄자이며, 감정의 극단과 안정을 아무렇지 않게 오갈 수 있는 존재들이다. 요시다 슈이치의 소설을 읽다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그래서 좀 섬뜩해진다. 내 주위의 누군가가 언제 악마(아, 이렇게밖에 표현하지 못하겠다)로 돌변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아니, 다른 누구도 아니고 나 자신이 언제 악마로 돌변할지 모르기 때문에. 과거의 사람들도 다 이런 감정을 가지고 있었을까? 혹여, 이것이 인류 전체가 가진 공통의 감정이 아니라, 시대에 따라 더 강화되어 온 것이라면?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를 탓해야 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