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알베르 카뮈, 《결혼 · 여름》, 책세상, 2009.

시월의숲 2010. 4. 18. 21:52

나는 두 눈을 활짝 열고 본다. 바다 위에는 정오의 엄청난 침묵. 아름다운 존재들은 저마다 제 아름다움에 대한 타고난 긍지를 지니고 있다. 세계는 오늘 온 사방으로 저의 긍지를 스며나게 한다. 이런 세계 안에서 무엇 때문에 내가 삶의 기쁨을 부정하겠는가? 그렇다고 삶의 기쁨 속에만 온통 빠져 있을 것도 아닌 바에는, 행복해진다는 것이 부끄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바보들이 판을 치는 세상이다. 향략을 두려워하는 자를 나는 바보라고 부른다. 오만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귀가 아프도록 얘기 들은 바 있다. "알고 있겠지죠. 그건 사탄의 죄악이랍니다. 조심해야 돼요. 그러다가는 탈선을 하게 되고 정력을 낭비하게 된답니다."라고 사람들은 떠들어대는 것이었다. 그후 과연 나도 배웠다. 어떤 종류의 자만심은…… 그러나 또 다른 어느 때는 이 세계가 온통 내개 주겠다고 모의를 해대는 삶의 긍지를 소리쳐 요구하지 않을수가 없다. 티파사에서는 '나는 본다'라는 말은 '나는 믿는다'라는 말과 같은 값의 뜻을 지닌다. 그리하여 나는 내 손이 만질 수 있고 내 입술이 애무할 수 있는 것을 부정하려고 고집하지 않는다. …… 나는 오직 내 몸 전체로 살고 내 마음 전체로 증언하면 된다. 티파사를 살고 그것을 증언할 일이다. 예술 작품은 그 뒤에 올 것이다. 거기에 바로 자유가 있는 것이다.(19~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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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혼자서 나도 언젠가는 반드시 죽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말이다. 왜냐하면 나는 그것을 믿을 수가 없고 오직 내가 가진 것은 타인의 죽음에 대한 경험뿐이기 때문이다. 나는 사람이 죽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다. 특히 나는 개들이 죽는 것을 보았다. 내 속을 뒤집어놓는 것은 그것을 손으로 만져볼 때이다. 그때 나는 꽃, 미소, 여자에 대한 욕망을 생각해본다. 그러면 죽음에 대한 나의 모든 공포는 삶에 대한 질투에서 온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나는 내가 죽은 뒤에도 여전히 살아 있을 사람들, 꽃과 여자에 대한 욕망이 살과 피로 된 의미를 갖고 있음을 실감하고 있을 사람들에 대하여 나는 질투를 느끼는 것이다. 이기주의자가 되지 않기에는 삶을 너무나도 사랑하기 때문에 나는 질투를 느낀다. 영원 따위가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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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가슴으로 확신할 수 있는 진실이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그늘이 피렌체 들판의 포도나무와 올리브나무들을 엄청나고 말없는 슬픔으로 뒤덮어가기 시작하는 어떤 저녁, 나는 이 진실이 자명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 고장의 슬픔은 아름다움에 대한 한갓 주석만을 결코 아니다. 저녁을 가르며 달리는 기차 안에서 나는 내 속에서 무엇인가의 응어리가 풀려가고 있는 것을 느꼈다. 슬픔의 얼굴을 가진 이것이 그래도 행복이라고 불리는 것임을 오늘 내가 어찌 부정할 수 있을 것인가?(56~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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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이란 한 존재와 그가 영위하는 삶 사이의 단순한 일치 바로 그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또 오래오래 지속되고자 하는 욕망과 반드시 죽어 없어지게 마련인 자신의 운명이라는 이중의 의식 이외에 인간을 그의 삶에 이어주는 더 온당한 통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여기서 우리는 적어도 그 어느 것에 대해서도 기대를 갖지 않는 방법을, 그리하여 현재를 우리에게 '덤으로' 주어진 유일한 진실로 간주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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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렬하게 사랑을 할 기회를 일단 가져보고 나면 인생은 그 열기와 빛을 다시 찾으려 하다가 다 보내고 만다.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에 따르는 관능적 행복, 불행에의 에누리 없는 몸바침은 내가 갖지 못한 어떤 위대한 능력을 요구한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무엇을 제외시키도록 강요하는 것치고 참다운 것은 없다. 고립된 아름다움은 결국 상을 찡그리게 되고 말며 혼자만의 정의는 마침내 억압이 되고 만다. 한쪽을 제쳐놓고 다른 한쪽만을 섬기려는 자는 아무도, 자기 자신도 섬기지 못하며 필경은 갑절로 불의를 섬기게 된다. 뻣뻣하게 무디어진 나머지 그 무엇에도 감격할 줄 모르게 되고, 모든 것이 다 아는 것이어서 인생이 되풀이일 뿐이게 되는 날이 오게 된다. 그것은 유적과 말라빠진 삶, 죽은 혼의 시절이다. 다시 살아나려면 은총이나 자기 망각이나 고향이 있어야 한다. 어떤 날 아침결, 어느 길모퉁이에서 감미로운 이슬 한 방울이 심장 위에 떨어졌다가 증발한다. 그러나 신선한 맛은 여전히 남아 있다. 마음이 요구하는 것은 언제나 그 신선함이다. 나는 다시 떠날 필요가 있었다.(16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