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장 주네, 《자코메티의 아틀리에》, 열화당, 2007.

시월의숲 2010. 2. 17. 21:38

아름다움이란 마음의 상처 이외의 그 어디에도 연유하지 않는다. 독특하고 저마다 다르며 감추어져 있기도 하고 때론 드러나 보이기도 하는 이 상처는, 누구나가 자기 속에 간직하여 감싸고 있다가 일시적이나마 뿌리 깊은 고독을 찾아 세상을 떠나고 싶을 때, 은신처처럼 찾아들게 되는 곳이다……내가 보기에 자코메티의 예술은 모든 존재와 사물의 비밀스런 상처를 찾아내어, 그 상처가 그들을 비추어 주게끔 하려는 것 같다.(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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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예술에서 이른바 개혁자로 불리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모르겠다. 작품이란 미래의 세대들에 의해 이해될 것이라는 소리인가. 왜 그런가. 그리고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미래 세대가 작품을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인가. 하면 무엇에? 나로서는 모르겠다. 그러나 ― 아직도 아주 모호하긴 하지만 ― 모든 예술작품이 가장 웅장한 범위에 이르려면, 무한한 인내와 노력으로 작품이 만들어지는 순간부터 수천 년을 거슬러 올라가 죽은 자들이 모여 있는 태고의 밤과 다시 만나야 한다는 것, 그리하여 그러한 작품 안에서 죽은 자들이 스스로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리라는 것만은 잘 알고 있다.

아니다, 아니다, 예술작품은 미래의 세대를 겨냥하지 않는다. 그것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죽은 자들에게 바쳐지며, 작품을 인정하거나 거부하는 것은 그들이다. 그러나 이 죽은 자들은 한번도 살아 있었던 적이 없다. 혹은 그들이 살아 있었다는 사실을 내가 잊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기억할 수 없을 만큼 아주 짧은 동안의 그들의 삶이란, 고요한 강가에서 하나의 신호 ― 이곳에서 보내진 ― 와도 같은 예술작품을 기다리고 알아보아 죽음의 강을 건너가도록 해주는 것이다.(9~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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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조각상들을 마주하면 또 이런 느낌도 든다. 그들 모두 상당히 아름다운 인물들인데도, 기형(畸形)의 불구자가 갑자기 발가벗겨진 채 일그러진 자신의 몸이 모든 사람 앞에 전시되는 것을 바라보는 듯한, 그리고 이러한 고독과 영광을 알리기 위해 스스로 세상에 드러내놓고 있는, 불구자의 슬픔이나 고독에 견줄 만하다는 느낌이 든다.(48~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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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목재로 지어진 아틀리에는 잿빛 가루에 휩싸여 있고, 점토의 조각상들은 밧줄, 밧줄 부스러기, 철사줄을 드러내고 있으며, 회색으로 칠해진 캔버스들은 화구상에서의 평온을 잃어버린 지 이미 오래다. 모든 것이 얼룩지고 뒤집어진 채 불안정하여 곧 무너질 듯했고, 다 녹아들어 없어져 둥둥 떠다니는 듯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어떤 완벽한 실체 안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다. 그리하여 아틀리에를 벗어나 거리로 나섰을 때, 그 순간 나를 에워싼 다른 모든 것은 진실이 아닌 듯했다. 그걸 말해야겠는가. 이 아틀리에 안에서 한 남자가 천천히 죽어 가며, 소진되어, 우리들 눈 아래에서 여신들로 변형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57~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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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코메티의 예술은 대상들 사이의 사회적인 관계 ― 인간과 그의 분비물이라는 관계 ― 를 맺어 놓은 사회적인 예술은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가진 것 없어도 당당한 룸펜의 예술이며, 대상들을 서로 연결시킬 수 있는 것은 모든 존재, 모든 사물의 고독에 대한 깨달음이라는 순수한 지점에 이르고 있다. 대상은 말하고 있는 듯하다. "나는 혼자다. 그러므로 내가 사로잡혀 있는 필연성에 대항해 당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내가 지금 이대로의 나일 수밖에 없다면 나는 파괴될 수가 없다. 지금 있는 이대로의 나, 그리고 나의 고독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당신의 고독을 알아본다."(60~6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