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배수아, 《서울의 낮은 언덕들》, 자음과모음, 2011.

시월의숲 2012. 6. 20. 20:14

몇 년 전 어느 날 경희는 이미 수년 동안 만나지 못했고 갑작스럽게 헤어진 후로 어떤 연락조차 없던 자신의 과거 독일어 선생이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고, 더 이상은 그 어떤 일도 할 수 없게 막연하고도 암울했으며, 더 이상은 아무런 행동도 불행도 느낄 수 없었고, 그러므로 불가능하게도 그를 찾아서, 불가능하게도 걸어서 여행을 떠나아겠다고 불현듯 결심을 했다고, 그렇게 자신의 즉흥적이면서도 피할 수 없었던 방랑의 시작 이유를 설명했다(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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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이나 정신의 현기증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단지 추상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랍니다. 구체적인 형체와 냄새가 있어요. 심지어 어떤 특정한 장소는 그것으로 가득 차 있기까지 하죠. 예를 들자면, 부엌의 두번째 의자에 앉을 때 나는 항상 어떤 특정한 감정을 느끼곤 한답니다. 그건 그 감정이 거기 살고 있어서 그런 거죠. 우리는 어느 순간 우연히도 그의 나라로 걸어서 들어간 거예요. 그때 뚝 하는 소리가 나고 이 초 후에, 아찔한 아픔 때문에 이마에 식은땀이 고이고 그 자리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을 때, 하지만 최대한의 인내심을 발휘하여 서너 걸음 떨어진 의자로 가서 간신히 그 위에 걸터앉을 수 있었을 때, 나는 알았어요. 오, 나는 나로부터 너무 과도하게 가버렸어. 내 육신은 횃불처럼 타오르는 삶의 신호등이지. 그것이 불이 켜진 거야. 가시오. 이제 나는 계속해서 갈 수밖에 없어.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답니다(20~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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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사람들은 그것을 단지 하나로, '존재의 중첩'이라고 표현하고 말 수도 있겠지요. 혹은 더욱 자세히 설명하자면 어떤 한 사람의 존재라는 것이 수많은 산과 강을 너머 어느 정도 이상의 시간과 지리적 한계에 다다르게 되면, 그때 수많은 산은 이미 모든 하나의 세계 산이며, 그때 수많은 강물 또한 모든 하나의 세계 강으로 흘러가버리니, 그 산 안에 내가 있고 그 강물 속에 내가 있어, 그때는 어떤 존재가 내가 아니라는 사실이, 내가 그 어떤 특정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이, 내가 바로 지금의 나 자신이라는 사실만큼이나, 동시에 수억 개의 별들이 섬광 속에서 소멸하며 미친 듯이 죽어가고 있는 이 우주의 시간 전체 안에서는, 더 이상 어떤 현상을 위해서도 결정적인 설명이 되어줄 수 없다는 느낌을 받았답니다(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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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이란 여러 가지 의미가 있긴 하지만, 그중에서도 우리에게 가장 결정적인 점은 우리를 더 이상 여행할 수 없게 만든다는 것이니까요. 나는 사업상의 여행이나 호텔에서 지내는 몇 주간의 짧은 휴가 등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방랑을 말하는 거지요(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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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태양이 몸이 되었다. 몸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하늘을 향해 길게 너울거리는 섬광의 형태로 나타났다. 발 없는 흰 횃불이었다. 몸은 불의 형체를 지녔다. 몸은 일생 동안 피투성이이며 몸은 신기하다. 몸은 몸이 내버린 것들로 뒤범벅된다. 태양이 제 몸을 태우며 타오른다. 몸은 나에게 속해 있다. 혹은 내가 몸에 속해 있는 것이다. 몸은 열려 있다. 사물과 정신이 몸을 투과하여 흘러간다. 몸은 안긴다. 몸은 따스하므로, 몸은 춥다. 몸은 아픔을 안다. 몸은 덜덜 떨 줄을 안다. 혹은 간지러움과 부드러움을 안다. 몸은 배가 부르며, 몸은 운다. 몸에서 뜨끈한 액체가 흘러나오는 것을 피 혹은 오줌이라고 부른다. 몸은 입맞춤과 어루만짐을 당한다. 몸은 몸을 사랑한다. 몸은 기꺼이 잠든다. 잠든 몸은 영혼의 여행자이다. 몸은 꿈을 꾼다. 꿈속에서 몸은 색이 춤추는 것을 본다. 묘사할 수 없는 반짝임이 세계를 이룬다. 나는 이것을 장님의 반짝임이라고 부른다. 눈동자에 와서 맺히는 영롱한 어룽거림들. 그러나 결코 묘사도 기억도 할 수 없는,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없는 무형체의 빛들(93~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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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부터, 도시를 하나하나 지나쳐서 걸어가다 보면, 이 모든 다른 얼굴과 자태의 도시들 사이를 관통하는 보이지 않는 시공의 혈관이 있어서, 그것은 일종의 정신의 공항 같은 것인데, 그것을 통해서 도시들이 동시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그리고 각자 별개인 도시들이 실제로는 아주 완전히 별개의 것이 아니라 서로 마주치고 관통하며 때로는 무의식중에 겹쳐질 수도 있음을(116~1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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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부모의 원에 의해서 태어난 아이가 아니다. 그들은 부모가 되고자 하는 의지가 없다. 어느 날 그들은 안녕, 우리는 앞으로 영원히 만날 일이 없을 겁니다, 하고 서로에게 편지를 쓴다. 그들은 내 몸을 통해서 계속해서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내 몸을 알기를 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버지가 루핀을 꺾어 노트 사이에 남겨놓는 것처럼, 나는 그렇게 무의지적 부모에 의해서 꺾이고 읽히고 마침내는 홀연히 남겨지는 존재임을 알고 있기에, 나는 안심이 된다. 그들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가지만, 나는 그들이 생각하고 느끼는 것을 생각하고 느낀다. 나는 그들이 만지는 것을 만진다. 그들이 나를 바라본다. 나는 스스로 낮은 언덕의 루핀이 된다(307~30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