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알랭 드 보통,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 청미래, 2011.

시월의숲 2012. 8. 20. 19:28

물론 우리는 고독해질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관계 형성에 대한 희망을 모두 버릴 수는 없다. 현대의 도시라는 외로운 협곡 속에서는 사랑보다 더 드높은 감정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종교가 이야기하는 사랑도 아니고, 그렇다고 넓고 보편적인 인류의 형제애도 아니다. 오히려 질투심 많고, 협소하고, 궁극적으로는 더 저열한 종류의 사랑이다. 이것은 낭만적인 사랑이며, 따라서 우리는 어떤 한 사람을 찾아내기 위해서 거의 광적이라고 할 만한 탐색에 나선다. 평생 동안 지속되는 완벽한 친교를 서로 성취할 수 있는 한 사람, 그리고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만나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도록 해줄 특별한 한 사람을 찾아내기 위해서(28~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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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각자의 모든 감정에 능숙하게 대처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종교는 상당히 현명하다. 그리고 우리가 자신의 절망, 욕망, 질투, 병적인 자만 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하는 것이 얼마나 혼란스럽고도 굴욕적인지를 종교는 잘 안다. 우리가 어머니를 향해서 어머니 때문에 화가 난다고, 또는 자신의 자녀를 향해서 너 때문에 질투가 난다고, 또는 배우자감을 향해서 당신과의 결혼은 기쁘기도 하지만 두렵기도 하다고 말할 방법을 찾는 과정에서 우리가 가질 수밖에 없는 어려움을 종교는 잘 이해한다. 따라서 종교는 우리에게 특별한 날들을 부여하며, 우리는 그날들의 위장망 아래에서 각자의 위함한 감정을 처리할 수 있다. 종교는 낭독할 대사와 부를 노래를 우리에게 제공하고, 그 도중에 우리 영혼의 불안한 영역 너머로 우리를 데려가는 것이다(66~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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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종교에서 배우는 것은 단순히 공동체의 매력만이 아니다. 우리는 또 한 가지를 더 배운다. 즉 훌륭한 공동체가 되려면, 사실은 그 구성원인 우리 안에 공동체를 진심으로 원하지 않는 요소가 많다는 점을 수긍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공동체를 질서정연한 모습으로 항상 유지하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사랑의 축제를 연다면, 반드시 바보들의 축제도 열어야 할 것이다(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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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에 관한 종교의 관점에 따르면, 우리가 마치 어린이처럼 대우받는 것에 대해서 지나치게 강하게 반발하는 것이야말로 결국에는 우리의 미성숙을 보여주는 상징이었다. 자유에 대한 강박관념을 가진 자유의지론자는 유년기의 구속과 인도에 대한 우리의 애초의 욕구가 여전히 우리 안에 남아 있다는 사실을 무시한다. 따라서 그들은 온정주의적 전략으로부터 우리가 배울 것이 매우 많다는 사실도 무시한다. 누군가를 향해서 당신은 완전히 성장했다고, 따라서 이제는 무슨 일이든지 간에 당신이 좋을 대로 해도 된다고 말하는 것도 아주 친절한 일은 아닐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그를 아주 자유롭게 해주는 일도 아닐 것이다(105~1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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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없는 사회의 현저한 위험은 초월적인 것을 상기시키는 장치가 결여되어 있다는, 따라서 절망과 궁극적인 절멸에 채 준비가 되지 않은 우리를 이 세상에 남겨두었다는 점이다. 신이 죽었을 때, 인간은 절체절명의 상태에서 심리학적 중심 무대에 나서야만 하는 위험에 직면하게 되었다. 인간은 자기 운명을 자기가 결정할 수 있다고 상상했으며, 자연을 짓밟았으며, 지구의 리듬을 잊어버렸고, 죽음을 부정했고, 자신들의 손아귀를 빠져나가는 모든 것을 과대평가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존중하지 않게 되었으며, 급기야 현실의 날카로운 가장자리에 충돌하는 재난을 당하게 되었다.

우리의 세속 세계는 우리를 부드럽게 제자리에 놓아줄 만한 의식이 부족하다. 대신에 우리에게 현재의 순간이 역사의 정점이며, 우리 인간의 성취가 만물의 척도라고 생각하도록 유혹한다. 이런 과도한 생각이야말로 우리를 연속되는 불안과 질투의 소용돌이로 밀어 넣고 있다(214~2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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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건축은 이러한 자기중심주의(잘못된 것일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고통스러운)와 관련해서 한 가지 중요한 기능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규모와 재료와 소리와 조명 기구를 사용하기에 따라서 우리의 신체 크기에 대한 우리의 인상을 조절할 수 있는 종교 건축의 힘 때문이다. 가령 엄청난 크기의, 또는 거대한 석재를 잘라서 만든 대성당에 들어갔을 때, 또는 멀리 있는 원형 창에서 스며들어오는 한 줄기 빛을 제외하면 너무나 어두운 어떤 장소에 들어갔을 때, 또는 간헐적으로 아주 높은 곳에서 깊은 웅덩이로 떨어지는 물소리를 제외하면 너무나 조용한 어떤 장소에 들어갔을 때, 우리는 흔치 않으면서도 위안이 되는 은혜를 느끼고 우리 자신의 하찮음―그리 불쾌하지 않다―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다(27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