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김연수, 《원더보이》, 문학동네, 2012.

시월의숲 2012. 7. 17. 00:13

우주의 모든 별들이 움직임을 멈추고 우리를 향해 일제히 빛을 내뿜는 순간은 단 한 번뿐이에요.

태어나서 단 한번.

우리가 죽을 때.

그렇게.

우리는 아이로 태어나 빛으로 죽는 것이죠.

영원히 빛으로 죽는 것이죠.

그렇다면 그건 정말 멋진 일일 거예요.

 

그렇지 않나요, 아빠?(42쪽)

 

 

*

 

 

스스로, 모든 건 스스로! 외부의 힘을 개입시키지 않고, 자기 자신의 힘으로, 그래서 저절로 모든 일들이 이뤄질 수 있도록! 이 세계의 모든 것들이 그렇게 되기로 한 것처럼 스스로 그렇게 되리라는 사실을 그저 믿기만 하면 돼.(91쪽)

 

 

*

 

 

그건 이 현실의 표면이 살짝 찢겨나간 틈에서 쏟아지는 빛이었지. 이 현실, 고차원의 눈으로 볼 때는 아무런 깊이가 없는 3차원의 세계. 마치 종이로 만든 것과 같은. 이런 세계에서는 우리 영혼이 아무리 깊어지려고 해도 불가능하지. 자기 본래의 모습을 만나려면 이 세계 바깥으로 나가야만 해. 이 세계가 우리를 붙들어매는 힘은, 즉 카르마의 중력은 집착이야. 희로애락들, 우리를 울고 웃고 화내고 슬퍼하게 만드는 것들에 대한 집착들. 감정의 불을 끄고 그 일들을 바라볼 수 있다면 이 현실의 중력장은 붕괴되지.(92쪽)

 

 

 

*

 

 

나는 그에게 물어. 왜 죽어야만 했느냐고. 그는 죽었으니까 자기가 왜 죽었는지 알아낼 수 없는 거야. 그가 왜 죽었는지는 내가 알아내야만 해. 마찬가지야. 네 아빠가 왜 죽어야만 했는지 대답할 사람도 네 아빠가 아니라 너야. 그게 바로 이해라는 것이지. 이해란 누군가를 대신해서 그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 그리고 그 이야기를 통해서 다시 그들을 사랑하는 일이야.(164쪽)

 

 

*

 

 

절망적이에요. 옆에서 사람이 죽어나가는데도 누구 하나 괴로워하질 않잖아요. 권력의 무자비한 폭력에 대해서는 경외하면서도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는 애써 눈을 감죠. 왜냐하면 이 나라에서는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것 자체가 탄압의 대상이고 이적행위니까요. 그러니 고통받는 사람들은 더욱 고독해질 수밖에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요? 국가는 왜 자기 안에 고통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적으로 간주하는 건가요? 그게 아니라면 가난하고 핍박받는 사람들의 고통에 공감하는 사람들을 이적행위자로 몰 이유가 없지 않나요? 우리에게는 이런 국가 말고 다른 국가를 선택할 권리가 없는 건가요? 만약 그런 권리가 우리에게 없다면, 무자비한 국가 폭력에 겁을 먹고 타인의 고통에서 눈을 돌리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과연 무엇일까요? 그건 타인의 고통을 공포보다 더 강하게 느끼게 만드는 일이에요.(190~191쪽)

 

 

*

 

 

해가 지는 쪽을 향해 그 너른 강물이 흘러가듯이, 인생 역시 언젠가는 반짝이는 빛들의 물결로 접어든다. 거기에 이르러 우리는 우리가 아는 세계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세계 사이의 경계선을 넘으리라. 그 경계선 너머의 일들에 대해서 말하면 사람들은 그게 눈을 뜨고 꾸는 꿈속의 일, 그러니까 백일몽에 불과하다고 말하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단 한 번도, 그 누구에게도 내가 본 그 수많은 눈송이들에 대해서 말한 적이 없었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인간은 누구나 아이에서 어른으로 자라고, 결국 생의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그 빛들을 경험한다는 사실을.(199쪽)

 

 

*

 

 

 

우주에 그토록 별이 많다면, 우리의 밤은 왜 이다지도 어두울까요?

 

그건 우리가 지구라는 외로운 별에서 살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천문학자들은 우리 은하에 어림잡아 3천억 개의 별들이 있다고 추정합니다. 이중에서 생명체가 살고 있다고 알려진 별은 현재로서는 지구뿐입니다. 그래서 지구는 고독합니다. 이 고독은 3천억분의 1의 고독입니다. 그 별들 중에서 생명체가 존재하는 별이 하나라도 더 있다면, 이 고독은 반으로 줄어들 것입니다. 그때 지구의 밤은 지금보다 두 배는 밝아질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지구 하나뿐입니다. 아무리 별이 많다고 해도 지구가 3천억분의 1만큼 고독한 한에는 지구의 밤은 여전히 어두울 것입니다.(30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