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이 누추한 육체 속에 얼마든지 머물다 가시라고

시월의숲 2012. 9. 7. 20:40

오늘은 오후에 조퇴를 하고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았다. 며칠 째 감기가 떨어지지 않아서 오늘은 결심을 하고 병원을 간 것이다. 환절기 때마다 치뤄야하는 통과의례같은 것이지만 그냥 참고 견디기엔 내 인내심이 좀 부족했던 것 같다. 오늘은 다른 날과 다르게 머리가 무겁고 몸이 축 쳐져서 도저히 일을 할 수가 없었다. 열도 나는 것 같았는데, 병원에 가서 열을 재보니 그렇지는 않았다. '열이 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봐요?' 체온계를 든 간호사에게 그렇게 물었더니, '그건 본인이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내가 자꾸 아프다고만 생각하고 있었던가? 실은 점차 낫고 있는 중이었는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집 근처의 그 병원에는 처음 간 것이었다. 대기실은 생각보다 넓었고 환자들도 생각보다 많았다. 대부분이 걷는것조차 불편해보이는 노인들이었다. 나는 접수대에 다가가 컴퓨터를 노려보고 있는 간호사에게 진료를 받으러 왔다는 말을 하려고 했지만 간호사는 내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잠시만 앉아서 기다리세요, 라고 말하고는 다른 환자를 호명했다. 나는 조금 멋쩍은 기분으로 대기실 의자에 앉았는데 20분이 지나고도 접수하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바쁜듯 지나가는 간호사에게 접수를 하려면 더 기다려야 하냐고 물었고 간호사는 잠시만 더 기다리라고 말했다. 켜놓은 텔리비전에서는 김정원과 친구들이라는 제목의 클래식 공연이 방영되고 있었는데 소리가 너무 작아 무슨 곡을 연주하는지 잘 들리지 않았다. 슈베르트의 아르페지오네 소나타였던가? 화면 속 첼리스트는 감정에 몰입한 표정으로 연주를 하고 있었지만 소리가 사라진 화면은 마치 그가 무언극이나 마임을 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저 첼리스트의 표정과 아픈 사람의 표정은 무엇이 다른가 잠시 생각하고 있는데 간호사가 접수를 했느냐고 물었다. 나는 기다리라고 해서 기다리고 있었다고 말했고 간호사는 접수만 보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수시로 간호사가 보일 때마다 접수를 해야한다고 말했다. 나는 조금 어이가 없었으나 길게 말할 힘도 없고 해서 그냥 순순히 접수를 했다. 실은 그때 간호사가 접수를 하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나는 그냥 병원을 나와서 약국에 들러 종합감기약을 사들고 집으로 갔을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결국 의사를 만났고, 주사를 맞았으며, 삼일치의 약을 지어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의 햇살은 뜨겁다기보다는 따가웠다. 따가운 햇살을 피해 집으로 돌아와 누워 잠을 잤다. 내 몸에 내가 아닌 누군가가 들어와 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