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독서

이언 매큐언, 『속죄』, 문학동네, 2003.

시월의숲 2013. 4. 19. 23:16

 

 

 

 

(스포일러 주의)

 

 

영화로 먼저 알게 된 소설이다. 영화를 본 것은 아니지만, 영화의 원작이 소설이고 그 소설을 쓴 작가가 이언 매큐언이라는 사실을 그 영화로 인해 알게 되었다. 그러다 이언 매큐언의 소설에 대해서 쓴 글(신형철의 글이었던가?)을 읽게 되었고 아마도 그때부터 작가의 이름이 내 의식의 어디쯤 각인되었던 것 같다. 처음에 도서관에 가서 그의 소설 『속죄』를 집어 들었을 때, 만만치 않은 두께와 알 수 없는 답답함 때문에 약간의 거부감이 들었다. 어쩐지 책을 사 볼 생각이 들지 않은 나는 도서관에 갈 때마다 이언 매큐언의 소설이 꼽힌 책장 앞에 서서 물끄러미 책등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이젠 읽어야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망설임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다. 그리고 무엇이 내가 그 책을 읽도록 결심하게 했는지도. 중요한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소설을 읽었다는 사실이다.

 

소설 속에 소설이 들어있는 소설이다. 말장난 같지만 사실이다. 총 네 개의 챕터로 이루어져 있는데, 앞의 세 챕터가 주인공 브리오니가 쓴 소설임을 마지막 장을 읽다 보면 알게 된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공상에 잘 빠지고, 감수성이 예민하며 자신이 본 것이 전부인 줄 아는 주인공 브리오니가 자신의 언니 세실리아와 그녀의 남자친구인 로비를 파멸로 몰고 가는 이야기다. 이때의 파멸은 주인공의 한순간의 잘못된 판단(그것도 누군가를 위한다는 명목으로!)으로 저질러진 것이고, 그것이 진정 진실임을 믿어 의심치 않은 데서 오는 것이기에 피를 뿌리며 난도질하는 살인행위보다도 더욱 끔찍하고 폭력적이며 잔인한 것이 된다. 어린아이의 입으로 자행되는 것이기에 더욱. 이처럼 증오스러운 주인공이 나오는 소설을 읽은 적이 있던가? 몇 마디의 말이 모든 상황과 사람을 파국으로 치닫게 할 수도 있음을 이 소설은 충분히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그만큼 주인공을 비롯한 등장인물들의 심리묘사가 세밀하고 유려하다.

 

제목이 <속죄>인 만큼 브리오니는 후에 자신이 저지른 행위가 돌이킬 수 없는 실수였음을 인정하고 속죄를 하기로 마음먹는다. 어떻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질러놓고 어떻게 속죄를 한다는 말인가? 이언 매큐언은 우리에게 문학적인 방식을 제시한다. 주인공 브리오니의 적성과도 딱 맞아떨어지는 속죄, 바로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소설로 써서 출판하는 것이다. 그런 것을 속죄라고 할 수 있는가? 개인적으로는 그녀가 하는 속죄의 방식이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브리오니 자신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최선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참으로 아이러니 한 일은, 그들을 파멸로 몰고 간 바로 그 공상과 타고난 감수성으로 자기 자신을 구원하려 든다는 사실이다. 비아냥처럼 들린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나는 브리오니의 속죄가 자기 자신을 구원하기 위한 얄팍한 위장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얼마나 위선적인 일인가! 자신은 60년에 걸친 속죄다 뭐다 하면서 실은 그들을 위한 것이 아닌 자신을 위한 속죄가 아니었나? 그녀가 처음으로 쓴 희곡, <아라벨라의 시련>이 자신의 노년에 가족들에 의해 완성되는 결말만 봐도 그렇다. 그것은 도대체 누굴 위한 것인가?

 

내 이런 불만에 대답이라도 하듯 브리오니는 소설의 마지막에 이렇게 고백한다.

 

  "지난 오십구 년간 나를 괴롭혀왔던 물음은 이것이다. 소설가가 결과를 결정하는 절대적인 힘을 가진 신과 같은 존재라면 그는 과연 어떻게 속죄를 할 수 있을까? 소설가가 의지하거나 화해할 수 있는, 혹은 그 소설가를 용서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 소설가 바깥에는 아무도 없다. 소설가 자신이 상상 속에서 한계와 조건을 정한다. 신이나 소설가에게 속죄란 있을 수 없다. 비록 그가 무신론자라고 해도. 소설가에게 속죄란 불가능하고 필요 없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속죄를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이다.…… 나는 그들에게 행복을 주었지만, 그들이 나를 용서하게 할 만큼 이기적이지는 않다. 그럴 만큼 이기적이지는 않다. 아직은 그만큼은 아니다(521쪽)."

 

그녀 자신도 속죄의 불가능성과 이기적인 속성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어쨌든 잘못은 저질러졌고,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일이므로. 다만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그럼에도 불구하고'에 있을 것이다.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이기적인 일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 어쩌면 우리는 모두 그것에 가까스로 매달려 있는, 매달려야만 하는 존재들인지도 모른다. 말 하나에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는 가련한 존재들인 동시에 말로 인해 나락에서 빠져나올 수도 있는 모순적인 존재들. 이 소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갈 수 밖에 없고, 그러므로 인간일 수밖에 없는 존재들을 위한 비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