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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이란 말에는 한 철 태양이 머물다 지나간 들판의 냄새가 있고, 이른 새벽 푸석푸석한 이마를 쓸어올리며 무언가를 끼적이는 청년의 눈빛이 스며 있고, 언제인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타고 떠날 수 있는 보너스 항공권 한 장에 들어 있는 울렁거림이 있다. 열정은 그런 것이다. 그걸 모르면 숨이 막힐 것 같은 어둠에 놓여 있는 상태가 되고, 그걸 갖지 아니하면 신발을 신지 않은채 낯선 도시에 떨어진 그 암담함과 다르지 않다.
사랑의 열정이 그러했고 청춘의 여정이 그러했고 먼 곳을 향한 열정이 그러했듯 가지고 있는 자와 가지고 있지 않은 자가 확연히 구분되는 그런 것. 이를테면 열정은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건넌 자와 건너지 않은 자로 비유되고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강물에 몸을 던져 물살을 타고 먼 길을 떠난 자와 아직 채 강물에 발을 담그지 않은 자, 그 둘로 비유된다.
열정은 건너는 것이 아니라, 몸을 맡겨 흐르는 것이다.(이병률 산문집, 《끌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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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시인 이병률의 여행 산문집인 <끌림>을 읽으면서 줄곧 그런 생각을 했다. 이 사람의 습관적이고도, 집요한 데가 있는 여행의 원동력이 무엇인가 하는. 보통 사람이라면 어느 한 군데도 제대로 가보지 못할 여행을 그는 정말 배가 고파 밥을 먹듯이 여행을 떠나고 사람들을 만나고 사진을 찍는다. 책의 뒷부분에 보면 아마 그러한 방랑벽은 고등학교 때부터 시작된 모양인데, 그것은 유별난 그의 열정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그러한 열정은 태어날 때부터 그의 피에 진하게 녹아있는 것이기에 가능했던 것이리라. 왜 그런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자신도 어쩔 수 없는 힘 때문에 무언가 하지 않으면 안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무엇에라도 쓰인 듯 끊임없이 여행하고, 기어코 높고 험준한 산을 오르고야 만다. 그곳에서 무엇을 보는지, 누굴 만나는지, 그래서 무엇을 깨닫는지 나로서는 전혀 알 길이 없지만(안다고 해도 완전히 이해할 수 없겠지만) 그들을 그렇게 만들고야 마는 어떤 힘이란 정말 대단한 것이구나 하고 경탄하게 된다. 그것이 지금 나에게는 없기에 더욱.
이병률의 <끌림>은 여행에 관한 산문집이지만, 여행지별로 분류된 것도, 시간 순서에 따라 배열된 것도 아니다. 프랑스, 영국, 프라하, 인도, 아르헨티나, 이탈리아, 베트남, 티베트, 포르투갈, 페루, 중국, 대만, 스위스, 미국, 핀란드, 일본, 불가리아, 콜롬비아 등등(일일이 호명하는데도 숨이 벅차다)을 다니면서 찍은 사진들과 그에 대한 단상 혹은 짤막한 일화를, 어떤 순서 혹은 분류에도 얽매이지 않고 그저 자유롭게 모아놓았다. 언제부터 언제까지 여행했는지도 알 수 없다(초판에는 나와 있었다). 그저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느꼈던 작가 자신의 '끌림'의 순간들을 스케치하듯 그려놓았을 뿐이다. 그러므로 굳이 처음부터 읽지 않아도 되고, 삽입된 사진이 어느 나라의 풍경을 찍은 것인지(책의 뒷부분에 나와 있긴 하지만) 알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된다. 그런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저 작가가 찍은 것으로 보이는 감성적인 사진과 또한 감성적인 글들을 편하게, 마음으로 느끼면 될 일이다.
여행지에서 느낀 고통보다는 여행에서 돌아온 자만이 느낄 수 있는 어떤 여유로움과 인간에 대한 믿음이 있어 읽는 내내 마음이 따뜻해진다. 참으로 대책 없고 유치할 정도로 감상적인 사람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건 그를 잘 모르고 하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그가 가진 인간에 대한, 삶에 대한 '대책 없음' 때문에 그는 그렇게 여행을 할 수 있었고, 지금의 그가 된 것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한 대책 없음이 삶의 한 방식이 될 수도 있음을, 나는 그의 산문집을 통해 깨닫는다. 처음에는 책에 실려있는 이국적인 사진에 끌렸으나 책을 다 읽고 나서는 그의 몸을 타고 흐르는 열정에 더욱 끌리게 되었다. '한 철 태양이 머물다 지나간 들판의 냄새가 있고, 이른 새벽 푸석푸석한 이마를 쓸어올리며 무언가를 끼적이는 청년의 눈빛이 스며 있'는. 열정의 대책 없음과 대책 없는 열정. 내가 그의 책을 서슴없이 집어들었던 것도 그러한 열정에의 끌림이, 그 보이지 않는 힘이 작용했기 때문이 아니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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