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의 소도시에 사는 사람에게 미술 전시회를 보러 가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보고자 하는 열망의 문제를 넘어서 일단 전시회 자체가 잘 열리지 않는데다 어쩌다 기획 전시 같은 것이 열리기라도 하면 시간이나 일정 등을 맞추기도 어려운 것이다. 물론 전시회를 찾아 보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면 이런저런 현실적인 어려움에도 기꺼이 가는 수고를 마다치 않을 것이나 그 또한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미술 관련 서적들을 읽는다. 클림트나 고흐 등 유명한 화가의 작품들뿐만 아니라 한국의 현대미술을 이끌고 있는 작가들의 작품들까지. 그들의 작품을 소개하고 작품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책들이 시중에 많이 나와 있다. 그런 책들을 읽으면서 전시회에 가지 못하는 아쉬움을 달래곤 한다. 하지만 책이 전시회에 가지 못하는 아쉬움을 달래주는 대안인 것만은 아니다. 전시회에 가서 그림이나 조각 등을 본다고 해도 그에 관한 배경지식이 없다면 무슨 소용인가? 물론 작품 자체에서 오는 느낌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 작품의 심연에 온전히 다가가기 위해서는 그 작품을 둘러싼 배경지식도 중요한데 그것은 그냥 본다고 해서 습득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작품을 보다 다양하고 폭넓으며 깊이 감상하기 위해서 책을 읽는다.
서론이 길었지만, 미술 관련 서적을 읽는 이유는 일단 그렇다. 다양하고 폭넓으며 깊게 감상하는 것. 그것을 위한 다양한 선택지들이 있지만, 박영택의 <예술가의 작업실>처럼 작가의 작업실과 작업 도구 등에 주목한 책은 드문 것 같다. 문학 기행이 어떤 작가의 문학작품이 탄생한 '공간'에 주목한 것이듯 박영택의 <예술가의 작업실>은 예술가들의 작품이 탄생한 공간인 작업실에 주목했다는 점에서 소위 '작업실 기행'이라 할 만하다. 이 책의 특색은 거기에 있다. 작가의 작품이 탄생하는 산실인 작업실에서 그 작품을 탄생시키기 위해 선택된 재료들과 연장들을 들여다보는 일은 마치 소문난 맛집에 찾아가 맛의 비결이 무엇인가 알아내는(좀 유치한 비교이긴 하지만) 것과 같은 느낌을 준다. 그만큼 내겐 작가의 작업실을 들여다보는 일이 비밀스럽게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작가의 작업실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다. 그러므로 당연히 예술 작품의 재료가 되는 것들의 특성을 알 길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내내 아, 아, 하는 소리를 혼자 내뱉었다. 아, 그래서 이 작품이 이런 표현과 느낌이 들게 되었구나 하고. 그건 신기하게도 작가의 작품에 좀 더 다가갈 수 있는 열쇠를 가진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했다. 작가는 자신이 선택한 물질을 이해하고 연장을 자유자재로 다루면서 하나의 작품을 탄생시킨다. 그렇게 물질을 이해하고 연장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을 감내해야 했는지, 얼마나 많은 벽에 부딪혀야 했는지 감히 헤아리기 어렵다. 우리가 전시회장에서 보는 것은 어쩌면 작가가 그러한 벽과 시간, 고독과 싸운 흔적일지 모른다. 모든 예술품은 아마도 그러한 고투의 흔적을 많든 적든 내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참으로 다양한 물질들이 있다. 파스텔이나 아크릴물감, 먹이나 유화물감 같은 익숙한 물질들에서부터 볼펜, 고무, 장지, 철, 못, 돌, 인화지 등에 이르기까지. 현대미술이 다루지 못할 재료들은 아마도 없는 듯 보인다. 다른 말로 모든 것들이 예술작품의 재료가 될 수 있고 예술작품 그 자체도 될 수 있다. 책에 소개된 열 두 명의 작가들 모두 저마다의 독특한 세계를 이루고 있었으나 그 중에서 신문지에 볼펜과 연필로 선을 긋는 최병소와 못을 박아 그림을 그리는 유봉상, 인화지 위에 칼로 선을 긋는 조병왕이 작품들이 인상적이었다. 특히 최병소의 작품은 우리가 흔히 접하는 볼펜과 연필로 신문지에 부단히 선을 그어 신문지를 전혀 다른 물질로 탄생하게 하였는데, 그 과정이 특별할 것 없으면서도 굉장히 강렬하게 다가왔다. 그렇게 태어난 작품과는 별도로 그의 작업실은 타 작가들의 작업실에 비해 작고 평범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사용하는 재료라고 해봤자 신문지와 볼펜, 연필이 다가 아닌가! 안창홍(아크릴)이나 홍정희(유화), 최기석(철)이나 박용석(대리석)의 작업실처럼 크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조금은 은밀하다 할 수도 있는 작가의 작업실을 들여다보는 재미가 있었다. 책을 읽고 나니 그 어느 때보다도 그들의 작품을 직접 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하지만 작업실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물질과 연장 그리고 작가의 영혼이 뒹구는 창조의 방'인 작업실을 가진 작가들이 얼마간 부러웠다. 하지만 이건 그들의 노동의 양과 고뇌의 깊이를 알 길이 없기에 하는 유치한 발상일 것이다. 그들의 작업실을 엿보고 난 뒤에 깨달았다. 작업실이 독립된 하나의 예술작품이 될 수도 있다는 것. 치열함이 없는 작업실이란 상상할 수 없다는 것. 중요한 것은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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