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독서

앙드레 드 리쇼, 『고통』, 문학동네, 2012.

시월의숲 2013. 6. 22. 12:04

 

 

앙드레 드 리쇼의 『고통』은 욕망에 관한 이야기다. 그리고 그 욕망 때문에 발생하는 고통에 관한 이야기다. 욕망은 부재, 혹은 결핍에서 오고, 고통은 욕망이 채워지기 전에도, 채워지고 난 이후에도 찾아온다. 욕망은 본능적인 것이므로 우리는 욕망하지 않을 수 없고, 그러므로 우리는 고통받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무언가를 욕망하는 한 우리의 고통은 계속될 것이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겠다. 욕망은 채워지고 나면 더는 욕망일 수 없으나, 우리의 욕망은 사라졌다고 생각되는 순간 또 다른 욕망이 찾아오므로, 그것은 영원히 반복되는 운명의 굴레와도 같다. 그러므로 우리가 계속 욕망하는 한 우리는 계속 고통받을 것이다. 신경계의 자동반사와도 같은 그것은, 어쩌면 인간의 피 속에 녹아있어 우리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것일지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늘 비극적이다.

 

『고통』에도 이와 같은 인물이 나온다. 테레즈라는 전쟁미망인과 그의 아들인 조르제. 독일과의 전쟁이 한창인 프랑스의 작은 마을에서 아들과 함께 사는 테레즈는 젊은 나이에 미망인이 된다. 그녀에게는 전쟁의 공포와 압박에도, 남편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어떤 것이 있다. 그것은 그녀의 내부에서 솟아 나오는 것으로 그녀 자신도 어찌할 수 없기에 고통스럽다. 그것의 이름은 욕망. 그 욕망은 성에 대한 것이기에 더욱 난감하다. 그러던 중 독일군의 포로가 마을로 오게 되고, 오토라는 이름의 독일군과 관계를 맺게 된다.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물론 테레즈는 그것을 사랑이라는 말로 포장하지만, 그것은 사랑이 아닐 것이다. 눈먼 욕망의 사탕발림일 뿐. 허기진 욕망과 욕망이 만나 서로 잠시 충족시켰을 뿐이다. 테레즈도 언젠가 전쟁은 끝날 것이고, 오토는 독일로 돌아갈 것이며, 결국 자신은 혼자 남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채워지지 않은 욕구가 너무나도 강렬하여 그 욕망이 초래할 현실적인 문제들은 보이지 않는다. 고통은 거기서 시작된다. 한마디로 이 소설은 욕망의 노예들이 겪는 고통의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욕망을 잘 다스리는 것은 가능한가? 이 소설을 읽으면 아무래도 그것은 불가능하게만 보인다. 우리는 욕망의 노예이며, 동물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인간이 특별한 존재인가?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오히려 다른 동물들보다 더 어리석은 존재들인지 모른다. 생각의 차이로 전쟁까지 불사하는 것을 보면. 물론 이건 지나친 단순화일 것이다. 그렇다면 진실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어디서부터 시작을 해야 하나? 그것은 인간이 욕망의 노예임을 자각하는 데서부터가 아닐까? 욕망의 노예라는 표현이 좀 그렇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안에는 우리도 어쩔 수 없는 본능적인 욕망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것은 채워지지 않는 것이고, 채워졌다고 생각되는 순간 더 큰 욕망, 또 다른 욕망이 입을 벌리고 자신을 덮친다. 거기서 고통이 발생한다. 욕망과 고통의 악순환. 그 불가피성. 그것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것이 맨 처음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인간에게 만약 희망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을 발견할 수 있는 지점은 욕망이 아니라 그것에 의해 발생하는  '고통' 쪽에 있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이 소설의 제목이 '욕망'이 아니라 '고통'인 이유도 아마 거기에 있지 않을까? 이런 말은 어떤가. 고통은 비로소 인간을 인간답게 한다, 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