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영덕

시월의숲 2014. 6. 8. 00:02

1.

영덕에 다녀왔다. 무슨 이름의 바다였는지 모르겠다. 아니, 바다 앞의 마을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모르겠다. 영덕의 해맞이 공원 근처에 있는 바다였는데, 차를 타고 지나가다가 조용하지만 파도가 유난히 세차게 치는 곳이 있어서 무작정 차를 세웠다. 이름난 해변은 아니었다. 한 무리의 가족들이 자리를 깔아놓고 앉아 있을 뿐, 사람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모래는 거칠었고 군데군데 거뭇거뭇했다. 주변이 조용했기 때문인지 파도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모래 위에는 하얀 포말이 거품처럼 길게 남아있다가 사라졌다. 아마도 그 모습에 이끌렸을 것이다. 우리는 신발과 양말을 벗고 바지를 무릎까지 걷은 뒤 바다를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갔다. 세찬 파도가 급작스럽게 달려들어 하마터면 넘어질뻔 했다. 환호성이 절로 나왔다. 생각보다 차가운 물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바닷물을 머금은 모래 위에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렸으나 금새 하얀 파도가 지워버렸다. 우리는 모래 위를 걸으며 시시때때로 와닿는 파도의 손길을 느꼈다. 문득 사진을 찍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디지털카메라를 가지고 오지 않았고, 내겐 스마트폰이 없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나는 그때, 바닷가에서 사진을 찍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사진을 찍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으나, 영덕을 다녀온 후 같이 간 이들이 찍은 사진을 본 후에야 그런 마음이 들었다. 거기엔 파란 하늘과 하얀 포말이 너무나도 선명하고 대조적으로 찍혀 있었다. 나는 그것을 가지고 싶었으나, 사진으로는 가질 수 없었다. 그래서 이렇게 글을 쓰게 된 것이다. 아쉬운대로 글로 스케치를 해놓기 위해서. 시간이 지나 잊혀지기 전에 말이다. 이 또한 쓰기 전에 벌써 실패를 예감하고, 쓰면서도 성공하지 못할 것임을 깨닫고, 결국 쓰고 나서도 아쉬운 마음을 달랠 길이 없어 망연자실하더라도.

 

 

2.

얼굴도 모르는, 아직 바닷속에 있을 아이들을 생각했다.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푸른 바다와 하늘, 하얀 파도에 환호성을 지르면서도 마음 한켠에는 짐처럼 무거운 생각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무서워서 바다쪽으로 다섯 발자국도 못가고 되돌아와야 하는게 인간인데. 바다는 너무도 많은 것들을 삼켰고, 너무도 많은 것들을 드러내지 않았나. 다만 진실도 함께 삼켜지지 않기를 바랄 뿐. 잊혀지지 않기를 바랄뿐이다. 바다는 죄가 없다. 죄는 인간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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