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있다고 꼭 고독 속에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말하는 고독은 물론 '다른 사람이 없는 상대'를 의미하지만 이 순간 나는 나 자신을 벗삼고 있다. 반면 내가 혼자 있든 누구와 함께 있든 나 자신이 내게 결핍되어 있을 때, '내게 결핍되어 있는 그 누구'가 다름 아닌 나 자신일 때, 이런 상태는 고립이다. (반대로 사랑은 상대방이 거기 있을 때조차 그가 그리운 상태를 말한다.) 고독 속에 있다는 것은 상대방이 거기, 내 안에 있다는 확신을 느끼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상대방과 내가 모두 결핍되어 있는 단절도 있다.(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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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드의 고독 속에는 또 다른 무엇이 있었다. 그는 토론토의 파크 레인에 있는 자신의 아파트 문에서 문패를 떼어냈다. 그의 소일거리 가운데 하나는 밤에 자신의 차를 몰고 삭막한 대로를 따라 들어서 있는 바아나 카페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식사하는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나, 벽을 대면하고 네온 불빛에 잠겨 재빨리 식사를 끝내는 사람들에게 귀기울였다. 그가 집에 걸어둔 에드워드 호퍼가 그린 <밤샘하는 사람들> 속에는 미국의 이 창백한 외톨이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 그는 가명을 사용하면서 희열을 느꼈고, 다국어를 사용하는 데 소질이 있어 이디시어나 독일어로, 혹은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 영어를 부활시키거나 속어를 사용하여 가상의 상대자들과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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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의 핵심 속으로의 온전한 칩거, 모든 것으로부터의 결별, 성급한 떠남, 이 모든 일은 굴드가 무대를 떠난 순간 이미 일어나 있었던 일이었다. 1964년의 사건은 그의 긴 탐구의 첫 단계가 아니고 마지막 단계였다. 후퇴 혹은 은거는 결렬이라기보다 음악과 이 반복되는 실종간의 해묵은 내밀한 공모였다. 이미 오래 전부터 음악은 그에게 참으로 존재하며, 그를 사로잡는 유일한 것이었다. 그밖의 것은 모두, 연주회는 한층 고통스럽게 그를 음악으로부터 갈라 놓는 것이었다. 집착하는 모든 것, 만남, 아이들, 일상의 작업들과 같은 기쁨과 고통의 이 매듭들은 늘 그에게 탈주를 꿈꾸게 했다. "아무곳이든지, 세상 밖으로."(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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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태도나 비정상적인 몸짓을 보면서, 정신의학에서 자주 언급되는 상동증(常同症)을 의심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오로지 두 손만이 생기에 넘쳐 보일 때가 있다. 몸에서 분리되어 나온 물체와 한 가지로 뒤편에 남아 있는 사람과는 아무 상관 없이, 지칠 줄 모르는 생명을 부여받은 부분처럼 보일 때가 있는 것이다. 여러 다른 피아니스트들처럼 그 역시 이 손들을 마치 몸에서 분리된 이해할 수 없는 무엇처럼 바라보았다. 손은 피아니스트가 아니라 피아노에 속해 있었다. 그가 건반 위로 쓰러질 듯 몸을 숙인 모습을 보면, 그는 마치 자신과 음악 사이에 더 이상 피아노가 존재하지 않기를 바라며 피아노 속에 자신을 지우고 융해시켜 버리려는 것 같다. '피아노 앞에 앉은 글렌 굴드'가 아니고,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인 것이다.(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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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드는 혼자가 아니었으며, 고독하지도, 외톨이도 아니었다. 그는 고독 속에 있었다. 그곳이 그의 거처였으며, 그가 받아들인 성채였다. 고독을 그는 낡고 닳도록 사용했다. 그가 공간 속에 사는 모습, 칩거하거나 추방당하지 않은 모습을 보는 유일한 순간은 연주를 하는 순간이었다. 음악은 그의 피부였다. 피아노 앞에 앉을 때면 변함 없이 몇 가지 필요 불가결한 요소들로 둘러싸여 있긴 했지만 말이다. 최고도로 틀어둔 난방 장치, 발 빝의 동양풍 양탄자, 아버지가 만든 의자, 그리고 피아노 위에는 오른팔이 닿는 곳에 알약과 물병이 있어야 했다.
그밖에도 작은 공간들, 스튜디오들이 있었다. 어린아이가 골방에서 놀이를 하며 자유의 한계를 가늠해 보듯이 그는 방음, 살균이 된(콘서트는 균을 옮긴다고 그는 말했다) 스튜디오로 마치 비밀 장소인 양 들어갔다. 그리고 이곳에서 기술과 황홀경의 언어가 이야기되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녹음의 경험은 음악에 존재하는 경험들 가운데 가장 모태 속에 있는 듯한 경험이다. 말하자면 완전히 격리된 삶의 한 형태인데, 실제로 나는 격리되지 않은 모든 것을 나의 음악 인생에서 잘라내 버리고 있었다." 스튜디오의 완전한 고독. 아무것도 그 안으로 침투하지 못하며,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곳. 그곳에선 원하고 명상하고 동의한 것이 아니면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이 고독은 외적인 것, 녹음으로 귀결된다. 시간과 공간 속에서 청중을 음악가와 분리시켰다가 원해진 순간에 하나가 되게 하는.(1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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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드는 예술가의 의무 사항의 중심에 '소멸감'을 두었다. 예술은 늘 덧없는 무엇이 될 수 있으며, 작품은 곧 꺼지고 마는 무엇이다. 그의 연주들은 종종 음악이 막 형성되어서는 조만간 사라져 버릴 것처럼 들린다. 그것들은 처음이자 마지막 말 같은 느낌을 주며, 그들의 황홀한 긴장은 정점 위에서 존재와 비존재를 가르는 아슬아슬한 균형으로 이루어진다.(1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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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굴드가 연주한 《골트베르크 변주곡》의 마지막 녹음의 마지막 부분(아리아의 재현)의 마지막 음들을 듣는다. 지속된 화음이 잠시, 새가 날아가 버린 가지가 희미하게 떨리듯이 부르르 떤다. 굴드를 들으며, 굴드에 관해 쓰며 결국 알게 된 것은 나 자신이다. 자신들의 삶을 살지 않았던 예술가들, 그러나 이들 덕분에 우리가 우리 자신의 삶을 그나마 괜찮게 살 수 있게 된 그런 예술가들을 경험할 때 늘 그렇듯이. 이 놀라움은 놀래키고 당황하게 만들고 기발하게 보이려는 욕구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 참된 놀라움은 아름다움 앞에서 우리가 "그래, 이거야. 이렇게밖에는 될 수 없었어"라고 말하도록 만든다. 발설된 것은 방금 전까지도 생각할 수 없었지만 이젠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예술은 가장 높은 사명을 지닐 때 거의 인간적인 아닌 무엇이 되어 버린다."고 언젠가 굴드도 말한 적이 있다.(1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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