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독서

무라카미 하루키, 『여자 없는 남자들』, 문학동네, 2014.

시월의숲 2014. 11. 23. 23:12

 


여전하다. 여전히 그는 젊고, 위트 있으며, 쿨하고, 가벼우면서도 무겁다. 누군가는 자기복제가 심하다고 비판할 것이고, 먹는 것과 섹스,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빼면 남는 게 없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생각건대, 그 말은 모두 사실이면서 교묘하게 사실이 아니기도 하다. 이번에 나온 하루키의 소설집『여자 없는 남자들』에도 변함없이 익숙한 그와 그의 세계를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익숙하다고 해서 재미가 없는 것은 아니며, 먹는 것과 섹스, 음악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고 해서 식상한 것 또한 아니다. 그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자신이 능숙하게 만들어 낼 수 있는 재료들을 가지고 또 한번 멋들어진 그만의 요리를 만들어내었다. 책에 실린 일곱 편의 신작 단편들을 읽는 동안 나는 요리사가 차려놓은 음식을 맛보듯이, 그가 그려놓은 세계를 하나하나 음미했다.

 

책을 읽으면서 이전에는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을 하나 깨달았다. 그것은 그가 그리는 세계가 표면적으로는 무척 여유롭고, 평온하며 유머러스하기까지 해서 특별히 심각하거나 비극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데 반해, 그 이면에는(그러니까 저 심연의 밑바닥에는) 거대한 블랙홀 같은 엄청난 비극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의 소설이 전체적으로 가벼워 보이는 이유도 비극(이라고밖에 표현하지 못하겠다)을 아무렇지 않게, 음식이나 음악에 대한 취향을 이야기하듯, 무심하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은 그러한 '비극'으로 인해 소설 속 인물들은 어딘가 심각하게 손상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것을 모른 채 지나가거나, 모르기 때문에 알 수 없는 일에 직면하고, 알 수 없는 고통을 당한다. 어쩌면 그렇게 손상된 자신의 중요한 부분을 치유해나가는 것이 하루키 소설의 주요 테마 중의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소설 속으로 들어가 보면, <드라이브 마이 카>에 나오는 가후쿠, <예스터데이>에 나오는 기타루, <독립기관>에 나오는 도카이 의사, <셰에자라드>에 나오는 그녀(세예자라드), <기노>에 나오는 기노, <사랑하는 잠자>에 나오는 잠자, <여자 없는 남자들>에 나오는 '나'가 처한 상황이 그러하다. 이것은 이번 소설집에서뿐만 아니라 아마도 그의 모든 소설(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에 해당되는 것일지도 모르는데, 하루키는 근본적으로 인간이란 어딘가 심각하게 손상된 존재라고 생각하고, 그런 존재들이 자신들의 손상된 부분을 어떻게든 치유하지 않고 살아간다면 분명 삶의 어떤 부분에서 문제가 생기게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그의 소설 속 인물들은 어느 순간 양을 쫓는 모험을 하고, 까마귀군을 만나 알 수 없는 일에 휘말리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모든 모험의 과정이 결국은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고(혹은 바로 알고) 자기 자신을 찾는 여정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하루키 소설의 또다른 테마는 두 세계의 대립이다. 그는 기본적으로 세계를 두 개로 나누고, 그 두 개의 세계가 부딪히며 벌어지는 양상을 소설로 형상화하는 것을 즐긴다. 이건 분명히 나 혼자만의 생각은 아니다. 왜냐하면, 하루키는 언젠가 인터뷰에서 자신의 세계관이 잘 드러난 소설이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실제로 그 소설은 그의 다른 어떤 소설보다도 '두 세계의 대립'이라는 세계관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로도 <해변의 카프카>나 <1Q84> 같은 작품에서 그러한 면모를 찾아볼 수 있지만, 그 효시는 바로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이다. 그러므로 형식적으로든 내용적으로든 그의 이러한 기본적인 세계관이 그가 쓴 모든 소설에 많든 적든 형상화되어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여자 없는 남자들> 역시 이러한 테마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 소설집을 관통하는 또 하나의 키워드는 바로 '사랑'이다. 어쩌면 '두 개의 세계'라는 테마처럼, 사랑 또한 그의 전 작품세계를 아우르는 주제일지도 모른다. 그의 대표작처럼 되어 있는 『상실의 시대』(혹은 『노르웨이의 숲』)가 이미 그러하지 않은가. 특히 이번 소설집에 실린 <예스터데이>를 읽으면서 어쩔 수 없이 <상실의 시대>를 떠올렸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는 면에서. <셰에자라드>와 <기노>는 둘 다 뒷 이야기가 무척 궁금해지는 소설이었다. 아마도 장편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생긴다. <사랑하는 잠자>는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을 오마쥬한 소설이다. <변신> 속 그레고르 잠자는 잠에서 깨어났을 때 벌레가 된 자신을 발견하지만, 하루키의 소설 속 잠자는 다시 인간으로 깨어난 자신을 발견한다. 벌레에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다시 태어나면서 자신이 인간이었던 때의 기억을 모두 잊어버렸다. 그는 새로 시작해야 한다. 하루키는 자신만의 상상력으로 카프카의 부조리하고 그로테스크한 세계에서 벗어난 새로운 잠자, 하루키만의 잠자를 만들어내었다. 하루키의 상상력이 돋보이는 매우 흥미롭고 독특한 소설이다. <여자 없는 남자들>은 이제까지 하루키의 스타일과는 좀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하루키식(?)의  표면적인 가벼움을 벗어던지고 제법 진지하고, 심각하게 '여자 없는 남자들'이 된 상황에 관해서 이야기한다. 이 소설만 따로 떼어내서 작가의 이름을 가린채 읽는다면, 아마도 하루키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알아채기 쉽지 않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독립기관>은 이 소설집에서 가장 인상 깊고 여운이 많이 남는 소설이다. 그 자체로 완결된, 하루키의 모든 매력이 충분히 발휘된 소설. '내적인 굴곡이나 고뇌가 너무도 부족한 탓에, 그 몫만큼 놀랍도록 기교적인 인생을 걷게 되는 부류의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처음에는 그런 부류의 사람이란 과연 어떤 사람인지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지만, 소설을 읽으면서 아, 그런 사람! 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사랑의 단면 혹은 속성을 절묘하게 보여주는 단편이 아닐까 한다.

 

<상실의 시대>를 읽던 때가 생각난다. 하루키를 처음 읽었던 때.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내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어떻게 달라지지 않았는지 알 수 없지만, 하루키는 여전히 내 곁에서 자신만의 매력을 잃지 않은채로 존재한다. 아무렇지 않은듯, 무심하게. 어쩐지 나는 그 사실에 안도감을 느낀다. 그가 그리는 세계가 완벽하게 내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않은채로 나는 그를 읽을 것이다. 하루키는, 여전히 젊고, 어쩌면 앞으로도 영원히 젊을 것이다. 그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