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독서

토마스 베른하르트, 『몰락하는 자』, 문학동네, 2011.

시월의숲 2014. 10. 3. 18:12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소설 <몰락하는 자>는 여러모로 그의 또다른 소설 <비트겐슈타인의 조카>와 많이 닮았다. 연보를 보면 1982<비트겐슈타인의 조카>가 먼저 출간되었고 곧이어 1983년에 <몰락하는 자>가 출간되었으므로 시기상으로도 비슷하다. 하지만 어떤 소설이 먼저 구상되고 집필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소설이 출간된 시기와 작가가 그 소설을 구상하여 집필한 시기가 일치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두 소설 간의 닮은 점을 말하자면(이건 그의 모든 소설에도 얼마간 해당되는 말일지도 모르겠지만), 문단의 구분이 극이 드문, 화자의 긴 독백으로 되어 있다는 점, 특별한 이야기가 있다기보다는 회상을 바탕으로 한 화자의 의식의 흐름에 중점을 두고 있다는 점, 화자 외에 두 명의 주요 인물들이 등장한다는 점, 동기는 다르지만 어쨌든 파멸하는 자 혹은 몰락하는 자를 그리고 있다는 점 등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비트겐슈타인의 조카>에서 몰락하는 자였던 파울은 자신 안의 광기에 의해 서서히 파괴되어 갔다면, <몰락하는 자>의 베르트하이머는 이상적인 예술 혹은 천재성 앞에 서서히 파괴되어 갔다(물론 화자는 또 다른 가능성, 그의 동생에 대한 지독한 애착에서 그 원인을 찾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엔 파괴된 자라는 점에서 둘은 같다. 나는 소설을 읽는 내내 어쩐지 이 둘을 떼어서 생각하기 힘들었다. 파울 속에 베르트하이머가, 베르트하이머 속에 파울의 모습이 겹쳐졌다. 앞서 두 명의 몰락의 차이점에 대해서 말했지만, 파울이 자신의 광기에 의해 자신이 잡아먹히는 지경에 이르렀듯이, 베르트하이머 역시 몰락의 원인 저 깊숙한 곳에는 내부적인 광기가 도사리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글렌 굴드와의 만남은 그저 자신 안에 있는 광기를 촉발시키는 계기로 작용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는 원래부터 불행한 인간이었고, 그 누구의 탓도 아닌 자신의 광기로 인해 몰락하게 된 것이다.

 

누구보다 촉망받던 피아니스트였고, 계속 피아노를 연주했다면 대가로 인정받을만한 우수한 인재였는데, 글렌 굴드의 피아노 연주를 듣던 그 순간, 그는 피아노 연주자로서의 자신의 인생이 끝났음을 깨닫는다. 그것은 자신이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벽임과 동시에 그 누구도 글렌 굴드의 연주를 뛰어넘지는 못할 것임을 알아차려버린 자의 필연적인 깨달음이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특히 그가 소설 속 베르트하이머와 같이 우수한 피아니스트였다면, 글렌 굴드의 연주를 듣고 피아노를 그만둘 만큼의 용기를 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그는 예술의 완벽성이 무엇인지 알았고, 자신은 그 이상에 도달할 수 없음을 또한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너무나도 투명하게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자신이 유리로 만들어져, 자신의 내부를 훤히 들여다 볼 수 있는 것처럼.

 

<비트겐슈타인의 조카>가 유명한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이 아니라 그의 조카를 그리고 있다면, <몰락하는 자>는 유명한 피아노 연주자 글렌 굴드가 아닌 그의 친구 베르트하이머를 그리고 있었다. 나는 처음에 <몰락하는 자>가 글렌 굴드의 이야기인 줄 알았다. 하지만 글렌 굴드는 이 소설에서 그저 이상적인 피아노 연주자, 천재적인 예술가,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금세기 최고의 피아노 대가로 그려져 있을 뿐이다. 그래야만 베르트하이머의 몰락이 더욱 완벽한(?)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미셸 슈나이더는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라는 책에서 토마스 베른하르트가 그 이름만 빌려와 조금도 닮지 않은 글렌 굴드를 만들어 내었다고 평했다. 굴드는 결코 피아노의 천재 중에서도 천재가 아니었으며, ‘행복한 인간도 아니었고, ‘타고난 피아노의 명인은 더더욱 아니었다고 말한다. <몰락하는 자>는 소설이므로, 실존했던 인물이 실명으로 등장한다 하더라도 그는 소설 속에서 새롭게 태어난 인물이지 실존했던 바로 그 인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 때문에 글렌 굴드라는 인물이 더 매력적으로 보인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소설 속 몰락하는 자였던 베르트하이머처럼, 심약하거나 섬세한 인물이 아니라 하더라도, 자신보다 월등한 기량을 지닌 누군가가 존재한다면, 그는 끊임없이 자신과 그를 비교하게 될 것이고, 거기서 오는 좌절감은 타인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거대한 것일지 모른다. 그것이 결국 자신을 파멸로 몰아넣을 수도 있을 만큼. 소설을 읽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베르트하이머처럼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는 않을지라도, 어쩌면 우리는 모두 서서히 몰락하는 자들이 아닌가 하는. 몰락의 원인을 외부적으로야 얼마든지 찾을 수 있겠지만, 결국 그것은 자신의 내부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그 몰락의 드라마가 얼마나 극단적이냐 그렇지 않느냐의 차이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