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듀나, 《가능한 꿈의 공간들》, 씨네21북스, 2015.

시월의숲 2015. 6. 11. 23:08

나는 지금도 유난이라는 단어를 싫어하고 그 단어를 남용하는 자들을 경멸한다. 그들은 다수의 등 뒤에 숨어 분명히 존재하는 타자의 괴로움을 무시하는 자들이다. 현대사회를 오염시킨 수많은 악행들은 바로 다른 사람을 '유난 떠는 종자들'이라고 무시한 둔한 인간들에 의해 저질러졌다.(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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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엔 더 중요한 것이 있고 덜 중요한 것이 있다. 하지만 그중 어느 것도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것을 묵살하거나 억압할 정도로 중요하지는 않다.(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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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는 우리가 모든 걸 이해할 수 있게 설계되어 있지 않다. 세상에는 이해할 수 없는 수많은 일들이 있다. 나는 <도가니> 사건의 가해자들이 어떻게 사건 이후에 그렇게 뻔뻔스러울 수 있었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스티븐 시걸의 팬들이 그에게서 어떤 매력을 보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광수 사장이 왜 자기 회사 아이돌들에게 뽕짝만 죽어라 주는지 모른다. 나는 왜 최근 실험에서 중성미자가 광속을 넘어서는 것처럼 보였는지 모른다. 어떤 것은 악이고, 어떤 것은 취향의 문제이고, 어떤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제외하면 그들 사이엔 아무런 공통점도 없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들을 하나로 묶는다. 그리고 어느 선에서부터 이는 선악을 가르는 기준이 된다.

"사랑하다보니 동성"의 논리를 끌어와 동성애자들을 이해하려 했던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라도 그들을 받아들여 그들이 타자화되는 걸 막아야겠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자기네들이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이유로, 자기가 성스럽다고 믿는 책의 내용과 어긋난다는 이유로 마녀들과 학자들을 산 채로 불에 태운 신심 깊은 신자들을 떠올렸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이야기를 진행시키다보면 그들의 논리는 훨씬 이타적이고 절실한 어떤 것이 된다.

하지만 이보다 더 쉬운 길이 있다. 우리가 세상 모든 것들을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냥 인정하는 것이다.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인정을 할 수 있는 영역은 충분히 가려낼 수 있다. 스티븐 시걸로 돌아가보자. 내가 시걸의 팬들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들의 존재가 부정되지는 않는다. 내가 억지로 온갖 말도 안 되는 논리들을 만들어 그들을 설명하고 이해하려 한다면 모두에게 귀찮은 일이 될 것이다. 그냥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공존하면 되지 않을까. 이해는 그 다음에 편할 때 해도 된다. 이해는 인정만큼 절실하지 않다.(89~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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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가능성을 상상하지 못한다는 것은 자신이 가하는 가학적인 행동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수많은 학교 폭력의 가해자들은 자신이 피해자에게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에겐 다른 사람이 느끼는 고통을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상상력을 갖지 못한 사람은 착한 일도, 나쁜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단지 나쁜 일을 기계적으로 유발할 뿐이다.(1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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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일부가 되어 그것을 현재의 시점으로 바라보는 이상 예술가들은 언제나 젊다. 하지만 그를 포기하고 꼰대질이나 하고 있다면 그들은 그냥 늙은이다. 늙었다는 것과 성숙은 동의어가 아니며 예술가들에게 젊음은 의무다. 그리고 자신을 늙은이로 여기고 있는 한 젊음은 결코 쟁취할 수 없다.(1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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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은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수많은 순간들에 의해 지탱된다. 내가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 사실이 달라지지도 않는다. 지금의 내 기억은 나를 정의하지 못한다. 어차피 나는 이후에도 수많은 것들을 잊고 다시 기억할 것이다.(1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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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은 인간이 처음으로 본 영화다.(1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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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모두를 공평하게 사랑할 수 없다고 해도, 최소한 무언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다. 개와 고양이에 대한 편애는 자연스러운 것이며 무의미하지도 않다. 적어도 그 사랑에 최소한의 책임감이 따라준다면 말이다. 게다가 이런 식의 활동과 인식은 우리와 공존하는 다른 생명체들에 전파될 수 있다. 어딘가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면 가장 가까운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건 당연하다.(2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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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 이후의 묘사가 부족하거나 얄팍한 것은 재난영화 서사 일반의 한계이다. 재난영화는 기본적으로 액션물에 속해 있지만 후일담은 전혀 다른 종류의 드라마를 필요로 하고 이 둘은 쉽게 하나로 연결되지 않는다. 재난영화는 재난의 징조에서 시작되어 재난이 사라지거나 극복되면서 끝난다. 하지만 재난을 극복하고 살아남은 사람들 대부분에게 재난은 이야기의 시작일 뿐이다.(24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