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김연수,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문학동네, 2007.

시월의숲 2015. 7. 15. 21:06

해가 저물어도 그 빛은 키 큰 나무 우듬지에 걸려 있듯, 꿈은 끝나도 마음은 오랫동안 그 주위를 서성거릴 수밖에 없는 법이다. 그런 까닭에 인생은 우리가 예상하는 것보다 조금 더 오래 지속된다.(32~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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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오랫동안 매혹시킨 몽상은 이런 것이었다. 성경보다도 훨씬 두꺼운, 아마도 이 세상에 이미 존재했거나 지금 존재하고 앞으로 존재할 모든 사물과 사람들의 내력을 적어놓은 책이 책상 위에 놓여 있다. 그 두꺼운 책이 자신의 읽어줄, 단 한 사람을 소망하는 것처럼, 나 역시 내가 읽을, 단 한 권의 책을 만나기를 오래도록 기다려왔다. 그러므로 나는 두 손으로 두근두근 뛰는 가슴을 억누르며 천천히 책이 놓은 그 책상으로 다가간다. 한참을 바라보다가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레 표지를 넘기면 내가 그토록 읽고 싶었던 이야기들이 마술처럼 흘러나온다.(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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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결론은 그에게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모든 게 달라졌으리라는 것이었다. 사랑은 입술이고 라디오고 거대한 책이므로, 사랑을 통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내게 말을 건네므로. 그리고 이 세상 모든 것들이 그 입술을 빌려 하는 말은, 바로 지금 여기가 내가 살아가야 할 세계라는 것이므로. 그리하여 우리는 이 세계의 모든 것들과 아름답게, 이토록 아름답게 연결되므로.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으니 사랑에는 아무런 목적이 없다는 것을, 오직 존재하는 것은 서로 닿는 입술의, 그 손길의, 살갗의, 그 몸의 움직임뿐이라는 것을 그도 알았더라면.(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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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든 것들이 언젠가 내가 보았던 꿈속의 풍경처럼 너무나 비현실적이었다. 사람들은 정신없이 길을 걸어가거나, 아이의 손을 잡고 노래를 부르거나, 좌판에 들러붙은 파리들을 파리채로 내리치거나, 견고한 콘크리트 바닥을 향해 곡괭이질을 하거나, 먼지 낀 하늘을 바라보며 담배연기를 내뿜거나, 버스 손잡이를 움켜잡은 채 차창 밖을 멍하니 내다보고 있었다. 그들이 나처럼 피가 흐르고 심장이 뛰고 희로애락을 느끼는, 정말 살아 있는 사람이라는 건 너무나 분명했지만, 나는 그 사실이 좀체 믿기지 않았다. 그래서 걸어다니다보면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그들을 붙잡고 "당신들, 정말 살아 있느냐? 정말 살아 있는 사람이 맞느냐?"고 묻고 싶은 충동을 억눌러야 했다.(120~1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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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무의미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이 세상은 온통 읽혀지기를, 들려지기를, 보여지기를 기다리는 것들 천지였다.(1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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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동물들은 보호색을 지녀 자기를 감추는데, 반딧불이는 왜 그렇게 환하게 자기를 드러내는 걸까? 자기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이 먼 지구까지 빛을 보내는 저 별들처럼 반딧불이들도 고독할 걸까? 그렇게 해서라도 서로 연결되려고 보호색 따위는 기꺼이 던져버린 것일까? 죽을 각오를 하고서라도 누군가에게 보여지기 위해서?"(1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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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이다지도 짧은 건 우리가 항상 세상에 없는 것을 찾고 있기 때문일지도 몰라.(173~1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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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란 관념이 아니라 욕망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했습니다. 인간의 욕망보다 강한 권력은 이 세상에 없는 모양입니다."(2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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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에 머물다가 단 한 번뿐이었다고 하더라도 빛에 노출되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평생 그 빛을 잊지 못하리라. 그런 순간에 그들은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가 됐으므로, 그 기억만으로 그들은 빛을 향한, 평생에 걸친 여행을 시작한다. 과거는 끊임없이 다시 찾아오면서 그들을 습격하고 복수하지만, 그리하여 때로 그들은 사기꾼으로 협잡꾼으로 죽어가지만 그들이 죽어가는 세계는 전과는 다른 세계다. 우리가 빠른 걸음으로 길모퉁이를 돌아갈 때, 침대에서 연인과 사랑을 나눈 뒤 식어가는 몸으로 누웠을 때, 눈을 감고 먼저 죽은 사람들을 생각하다가 다시 눈을 떴을 때, 몇 개의 문장으로 자신의 일생을 요약한 글을 모두 다 썼을 때, 그럴 때마다 우리가 알고 있던 과거는 몇 번씩 그 모습을 바꾸었고, 그 결과 지금과 같은 모습의 세계가 탄생했다. 실망한 사람들은 새로운 시대, 거대한 변혁의 시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살아갈 뿐이다. 그들은 그렇게 살아가도록 내버려두자! 그들에게는 그들의 세계가 있고, 우리에게는 우리의 세계가 있다. 이 세계는 그렇게 여러 겹의 세계이며, 동시에 그 모든 세계는 단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믿자! 설사 그 일이 온기를 한없이 그리워하게 만드는 사기꾼이자 협잡꾼으로 우리를 만든다고 하더라도. 그 세계가 바로 우리에게 남은 열망이므로.(37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