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에밀 아자르, 《가면의 생》, 마음산책, 2007.

시월의숲 2015. 5. 26. 23:27

시작이란 없다. 나는 누군가의 자식이고, 사람은 각자의 차례대로 이 세상에 태어난다. 그러고는 어딘가에 소속된다.

나는 그 굴레에서 스스로 벗어나기 위해 온갖 시도를 다 해보았다. 하지만 그 일을 해낸 사람은 없었다. 인간이란 모두 어딘가에 더해진 존재다.(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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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는 배관공, 서기, 공무원들이 있었다. 물론 실제로 그들은 배관공도, 서기도, 공무원도 아니었다. 그들의 실상은 전혀 달랐다. 하지만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들은 하루에 여덟 시간 동안 자신을 위장했다. 그러자 사람들은 가만히 내버려두었다. 그들의 내부에 숨어 사는 자신이 밖으로 나오는 것은 한밤중 좋은 꿈이나 악몽을 꿀 때뿐이다.(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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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비단뱀이 된다. 흰 생쥐, 충직한 개,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음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다 된다. 정상으로 돌아오는 데 필요한 입원과 치료가 다시 시작된다. 나는 가만히 기다리고 있다가 다른 것, 다시 말해서 재떨이, 종이칼, 움직이지 않는 물체처럼 죄를 물을 수 없는 것들로 뛰어들어 모습을 감추어버린다. 여러분은 그것을 광기라고 부르려는가? 나는 그렇지 않다. 나는 그것을 합법적인 방어라고 부르련다.(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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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동원할 수 있는 공포의 근원을 늘 확인하기 위해 나는 위대한 박해자의 초상화를 벽에 걸어놓고 싶었다.(1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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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형태가 사람의 부재를 표상하는 듯했기 때문에 의자들은 특히 나에게 공포를 불러일으켰다.(1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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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익명으로 남고 싶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익명의 시골 익명의 마을에서 익명의 여자와 익명의 사랑을 나누어 역시 익명의 가족을 이루고 익명의 인물들을 모아 새로운 익명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1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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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비단뱀이 되었다가 그다음에는 어딘가에 덜 소속되기 위해 책이 되었다. 나는 스스로를 통제하고 장악하고 저작권을 챙겼다. 내 안에는 서로 싸우는 두 사람, 내가 아닌 인물과 내가 되고 싶지 않은 인물이 있었다. 죄의식은 명백한 증거를 들이대며 줄곧 나를 압박했고, 주위에서는 일상성과 익숙함이 계속되었다. 나는 나 자신에게서 좀 더 멀어지기 위해 날마다 나 아닌 존재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1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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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겐 당신의 위로나 희망적인 계략 따위는 필요가 없습니다. 인류는 종류를 알 수 없는 나무에서 떨어진 열매일 뿐입니다. 가능한 유일한 해결책은 실상을 깨닫는 것을 회피하고 타락과 실패와 미완성과 불구라는 스스로의 본질을 받아들이는 것뿐입니다.(16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