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보면 알 수 있는 것과 봐도 알 수 없는 것

시월의숲 2015. 8. 14. 22:29

"나는 나쁜 척 하는 사람보다 착한 척 하는 사람이 더 싫어."

 

그는 혐오스럽다는 표정으로 말을 했다.

 

"누군가 나쁜 척을 하는지, 착한 척을 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지? 어떻게 그렇게 단정 지을 수 있어?"

 

나는 그의 혐오로 가득한 표정에서 나오는 단정적인 말에 거부감을 느꼈다. 그러자 그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정말 몰라서 그러는 거야, 아님 너도 착한 척을 하려고 드는 거야? 어떻게 모를 수가 있지? 그건 딱 보면 알 수 있는 거야!"

 

"너야말로 선입견으로 똘똘 뭉친 채 사람을 평가하고 있구나. 정말 나쁜 사람과 나쁜 척을 하는 사람, 정말 착한 사람과 착한 척을 하는 사람을 어떻게 딱 보면 알 수 있는 거지? 그거야말로 네 자의적인 기준일뿐이지. 사람이 그렇게 단순한 존재던가?"

 

그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지만, 기가 찬다는 웃음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를 보는 그의 눈길 속에는 '넌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애송이일 뿐이구나, 아니면 세상을 아름답게만 보는 이상주의자거나'라는 냉소의 말이 담겨 있음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그는 내가, 그가 그렇게도 혐오한다는 '착한 척'하는 사람의 부류에 속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왜 그가 착한 척 하는 사람, 다시 말해 위선자를 그렇게도 싫어하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어쩌면 그에게 위악자와 위선자를 알아보는 법이 아니라, 그가 왜 위악자보다 위선자를 더 싫어하는지를 물어봐야 했는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딱 보면 알 수 있다'는, 내가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듣고 거부감을 느끼지는 않았을 것이다. 인간들에게 어느 정도의 선입견과 고정관념은 살아가다 보면 생기게 되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치더라도, 그러한 선입견과 고정관념이 타인을 추호의 의심도 없이 단정 짓는 잣대로 작용하게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혐오해야 할 것이 아닌가? 인간은 모두 많건 적건 위악과 위선을 함께 가지고 있지 않은가? 그것을 어떻게 적절히 조절하느냐가 인간관계의 세련됨을 결정하는 것이다. 마냥 착한 사람도, 마냥 악한 사람도 없듯이, 마냥 착한 척하는 사람도, 마냥 나쁜 척하는 사람도 없다. 이 또한 내 선입견이라고 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 최소한 자신이 가진 어떤 고정관념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인식은 늘 하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내가 정말로 그가 말한 것처럼, 위선을 떨고 있는 것이라면? '딱 보면 알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딱 봐도 알 수 없는 것'도 있다. 그러므로 어쩌면 의심만이 인간을 늘 깨어있게 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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