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여기에 가급적 감정이 배제된, 그것이 비록 앙상한 모습일지라 하더라도, 사실로써 확인된 이야기들만 적으려 노력하고 있다. 그것이 애초 나의 의지였다. 하지만 나는 법이니 사회과학이니 하는 것들도, 말하자면 감정 배제의 원칙 위에 세워진 것들 또한 혐오나 모멸, 수치심이나 분노, 슬픔 같은 것들을 은밀히 내장하고 있으며, 심지어 어느 항목들은 그런 것들의 기초 위에 세워져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나는 감정 없는 법의 얼굴을 본 적이 없으며, 감정의 주석을 달지 않고 세상에 나온 논문을 본 적이 없다. 다만 그것들은 자신들이 감정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고 착각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 사실들로 인해 진실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도착하거나, 우리와 점점 더 멀어지게 된다. 나는 그 한계를 잘 알고 있으며, 그래서 그 한계를 미리 인정한 채 이 글을 쓰는 편이 더 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255쪽, 이기호, 「아이도스」, Axt, 9/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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