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황정은, 《계속해보겠습니다》, 창비, 2014.

시월의숲 2015. 9. 9. 21:08

뭘 하며 걸었어?

라고 내가 물은 적이 있었다.

애자는 한참 생각에 잠겨 있다가 이야기했지,라고 대답했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어느 것 하나 기억나는 것은 없지만 끝없이, 끝없이 이야기를 하며 걸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하고도 기억나는 것이 없느냐고 재차 묻자 그건 말이지,라고 애자는 말했다.

너무 소중하게 너무 열심히 들어서 기억에 남지 않고 몸이 되어버린 거야.

몸?

들었다기보다는 먹은 거야. 기억에도 남지 않을 정도로 남김없이 먹고 마셔서, 일체가 되어버린 거야.(9쪽)



*



있지.

넷이서 행복해지자며 쉬지도 않고 열심히 일했는데.

가엾어.

어째서 그렇게 열심히 산 걸까.

애자는 나나와 나에게 그 이야기를 반복해서 들려준 뒤, 언제고 그런 식으로 중단될 수 있는 것이 인생이라고 덧붙였다. 너희의 아버지는 비참한 죽음을 맞았지만 그가 특별해서 그런 일을 겪은 것은 아니란다.

그게 인생의 본질이란다.

허망하고.

그런 것이 인간의 삶이므로 무엇에도 애쓸 필요가 없단다.(12쪽)



*



사랑에 관해서라면 그 정도의 감정이 적당하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윽고 괜찮아지는 정도. 헤어지더라도 배신을 당하더라도 어느 한쪽이 불시에 사라지더라도 이윽고 괜찮아,라고 할 수 있는 정도. 그 정도가 좋습니다.(104쪽)



*



잊지 마.

내가 이렇게 아플 수 있으면 남도 이렇게 아플 수 있다는 거. 제대로 연결해서 생각해야 해. 그런데 이렇게 연결하는 것은 의외로 당연하게 일어나는 일은 아닌지도 몰라. 오히려 그런 것쯤 없는 셈으로 여기며 지내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는 정도인지도 몰라. 그러니까 기억해두지 않으면 안돼. 안 그러면 잊어먹게 되는 거야.


잊으면 괴물이 되는 거야.(160쪽)



*



하나뿐인 부족도 있는 거지 세상엔.

나는 소라에게 그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꽤 오래전, 일본으로 떠나기 전에, 전날밤에.

간장을 싫어하는 부족.

간장을 좋아하는 부족.

간장을 싫어하지도 좋아하지도 않는 부족.

부족이 되나, 하고 소라는 물었지.

나 하나뿐인데?

하나뿐인 부족도 있는 거지 세상엔.(201쪽)



*



뭐가 아름다웠어?

아름답다고 여긴 광경은 한밤의 번화가에서. 그때 나는 길을 건너려고 횡단보도 앞에 서 있었는데 넓은 도로를 건넌 곳에 고성을 둘러싼 검은 담벼락이 이어져 있었고 그 담벼락 앞에 드럼을 두드리는 남자가 있었지. 도로를 건넌 곳이라서인지 소리가 들리지 않았지. 그는 박자를 타는 듯 상체와 머리를 앞뒤로 크게 꺾어가며 드럼을 두드리고 있었는데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아 음악을 연주하고 있다기보다는 행위예술을 하는 사람처럼 보였지. 내 곁의 사람들은 무뚝뚝하게 선 채로 그쪽을 바라보거나 바라보지 않고 있었고…… 아무튼 이상한 장소에 이상한 방식으로 드럼 세트를 구비해두고 그는 혼자서 드럼을 두드리고 있었지. 그런데 그게 아름다웠지. 아름답다고 나는 생각했지.

무섭다고 여겼던 것도 같은 광경.

몹시 격렬하게 두드리고 있는데도 들리지는 않던 그의 드럼.

아무도 특별하게 여기지 않는 듯한 그 기묘한 발광.(211쪽)



*



아무래도 좋을 일과 아무래도 좋을 것.

목숨이란 하찮게 중단되게 마련이고 죽고 나면 사람의 일생이란 그뿐,이라고 그녀는 말하고 나나는 대체로 동의합니다. 인간이란 덧없고 하찮습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사랑스럽다고 나나는 생각합니다.

그 하찮음으로 어떻게든 살아가고 있으니까.

즐거워하거나 슬퍼하거나 하며, 버텨가고 있으니까.(22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