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의서(書)

우리의 진실한 모습은 오직 우리가 꿈꾸는 것뿐

시월의숲 2016. 6. 25. 15:50

우리의 진실한 모습은 오직 우리가 꿈꾸는 것뿐이다. 나머지는 현실이라는 여분으로, 우리가 아닌 이 세상과 사람들에게 속한다. 내가 꿈을 이룬다면 꿈은 아무런 저항 없이 기꺼이 현실에 동화되면서 나를 배반하고 떠나가버릴 것이고, 나는 질투에 휩싸일 것이다. 누군가, 나는 꿈꾸는 모든 것을 다 이루었다, 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나약한 자의 거짓말이다. 삶이 그를 통해서 이루어낸 모든 것을 그 자신이 예언자처럼 미리 꿈꾸었다고 하는 편이 진실에 부합한다. 우리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다. 삶은 우리를 돌멩이처럼 허공으로 던져버렸는데, 날아가면서 우리가 말하는 것이다. "봐, 내가 내 힘으로 나가고 있잖아."(582쪽,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봄날의책,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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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늘 무언가를 개척하고, 추구하며, 쟁취해나가기를 강요받는다. 우리들의 부모님, 선생님들은 우리에게 늘 꿈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자신의 삶에 주인이 되라고 종용한다. 하지만 생각해보라. 우리 모두는 삶이라는 알 수 없는 공간에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던져진 존재들이 아닌가. 우리가 그렇게도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힘들게 서로 경쟁하며 사는 것이, 우리 자신의 의지로서가 아니라 삶에 의해 던져진채 정해진 곳으로 날아가고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내가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삶이 나를 사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오로지 우리의 꿈 속에서만 살아갈 수 있는  것인가. 꿈을 현실로 이룬다는 것은 정말 꿈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나는 페소아가 오래 전에 선언하듯 한 저 말이 현재 우리들의 삶을 적확히 표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놀란다. 계급은 노골적으로 고착화되고, 계급간 이동은 철벽으로 막힌 채 단절되고, 금수저와 흙수저는 영원히 금수저와 흙수저가 될 수 밖에 없는 현실 속에서 아등바등 살아간다. 누군가는 페소아의 저 글에서 도저한 패배의식과 허무주의를 지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세상의 모든 희망찬 말들을 끌어다 놓는다고 해도 페소아의 저 한 문장에 담겨 있는 깊은 울림에 비할 바는 못될 것이다. 그것은 비극적이고도 모순적이라서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봐, 내가 내 힘으로 나가고 있잖아." 하지만 우리는 이미 삶이 우리를 돌멩이처럼 허공으로 던져버렸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내가 내 힘으로 나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기만적인 말인지, 얼마나 자괴감에 찬 블랙유머인지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쓴웃음이 전부라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