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의서(書)

나의 말없는 산책은 끊임없는 대화다

시월의숲 2016. 8. 1. 00:04

  누구에게나 배울 수 있고 배워야 한다는 것이 삶의 규칙이다. 사기꾼이나 도둑놈에게서도 진지하고 중요한 깨달음을 얻는가 하면, 바보들이 가르쳐줄 수 있는 철학도 있다. 예상하지 못한 우연과 그 우연의 결과 굳건함과 정의라는 교훈을 얻을 수도 있다. 모든 것이 모든 것 안에 있다.

  깊은 사색 도중에 문득 찾아오는 특정한 통찰의 순간. 예를 들어 어느 이른 오후 방랑하는 관찰자인 내가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으면 모든 행인이 새로운 소식을 전해주고 모든 건물이 새로운 가르침을 주며, 모든 플래카드에는 나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적혀 있다.

  나의 말없는 산책은 끊임없는 대화다. 우리, 인간과 건물, 돌과 플래카드, 그리고 하늘을 포함한 모두는 운명의 장대한 행렬 속에서 우정의 덩어리를 이룬 채 언어로써 서로를 밀치며 나아간다.(594쪽,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봄날의책,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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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배울 수 있다는 것. 나는 그것이 나와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주고받는 영향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서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하지만 그 영향은 사물을 주의 깊게 살펴보지 않으면 결코 알 수 없다. 길가의 이름 모를 풀이나, 돌멩이, 사람들, 가로등과 나무들은 저마다 자신만의 소리를 내지만, 우리가 그들의 소리를 알아듣고, 느낄 수 있는 순간은 흔치 않다. 그것은 페소아가 말했듯, '깊은 사색 도중에 문득 찾아오는 특정한 통찰의 순간'이기 때문이다. 페소아의 글을 읽고 있으면 어느 순간, 내가 페소아가 말한 공간과 느낌을 함께 공유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예를 들면, '어느 이른 오후 방랑하는 관찰자인 내가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으면 모든 행인이 새로운 소식을 전해주고 모든 건물이 새로운 가르침을 주며, 모든 플래카드에는 나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적혀' 있다고 나 또한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도 언젠가 '이른 오후에 방랑하는 관찰자'였으며, 그가 느낀 것(모든 사물이 나에게 메시지를 전해주는 것만 같은)을 느낀 적이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나는 혼자 말없이 산책을 하지만, 그런 내 산책은 끊임없는 대화이며, 모든 것이 모든 것 안에 있음을 느끼는 그런 순간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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