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어떤 중얼거림

시월의숲 2017. 10. 10. 22:17

기나긴 시간을 다른 곳에서 생활하다 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긴 연휴 동안 나름 이곳저곳을 다녔기 때문일까. 아님 연휴 자체가 길었기 때문일까. 일에 대한 걱정 때문에 연휴를 망치지나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쉬는 동안에는 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다만 어제 직장 상사의 반갑지 않은 전화로 인해 연휴의 마지막을 망친 것이 분하긴 하지만. 긴 연휴로 인한 휴유증과 직장 상사의 반갑지 않은 전화로 스트레스를 받아서인지 오늘 아침 일어날 때부터 목이 아팠다. 이건 분명 계절이 바뀔 때마다 찾아오는 감기의 전조다. 나는 늘 환절기 때마다 감기에 걸렸고, 감기에 걸리는 첫 신호가 늘 목의 통증이었으니까. 아마 내일 쯤이면 목에서 코로 증상이 넘어가면서 기침과 코막힘, 콧물이 흐를 것이고 열이 나면서 몸살이 나겠지. 매번 통과의례처럼 겪는 일이지만, 이 불쾌함은 익숙해지지 않는다. 지금 내가 몸이 아플 시기가 아닌데. 가열차게 일을 해나가야 하는 시기에 아프면 어떡하라는 것인지. 자꾸 혼자 투덜대게 된다. 아직 본격적으로 아프지도 않는데 말이다. 아플 것이라는 예상만으로도 기분이 좋지 않다. 가을이 오는 것은 좋으나, 감기가 오는 것은 당연히 싫은 것이다.


연휴 동안 제법 많은 곳을 돌아다녔다. 영덕의 바다를 보러 갔고, 안동의 탈춤페스티벌을 구경했으며, 봉화의 국립백두대간수목원을 다녀왔고, 대구의 동화사와 서문시장을 보고 왔다. 이트레이더스에서 쇼핑을 하고, 내가 새로 이사할 아파트의 가구를 보러 가기도 했으며, 역시 내가 이사할 아파트의 인테리어를 참고할 겸 구경하는 집을 둘러보기도 했다. 이 모든 일들을 동생 내외와 조카들, 고모와 사촌동생들, 아버지와 함께 했다. 내가 산 식재료로 요리를 해서 먹었으며, 때로는 식당에서 사먹기도 했다. 열 명 남짓한 가족들이 먹어야 하는 식사 비용도 만만치 않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는 먹어야 하고, 즐겨야 하며, 떠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하다보면 예전에 하던 이야기를 또 하기도 하고, 한 가지 이야기를 계속해서 하기도 했지만, 어쨌건 지치지도 않고 이야기를 했다. 물론 대부분이 어린 조카들과 하는 실랑이였지만 말이다. 조카들은 우리들의 이야기에 질투라도 하듯 쉴 새 없이 떠들고, 소리 지르고, 온 몸으로 달려들고, 방심하는 순간 머리를 때리고 도망가기도 했다. 조그만 무법자요 집안의 실질적 왕이었다. 우리들은 모두 조카들의 노예 혹은 집사였던 것이다. 하지만 아이들의 커다란 무기 - 해맑게 웃으며 안기는 모습 - 에 어른들은 매번 항복하고 만다. 입으로는 버릇없이 구는 행동에 대해 분개하면서도.


긴 연휴였지만 어쩐지 길다고 생각되지 않는 연휴였다. 긴 시간을 다른 곳에서 생활하다 온 것 같다고 말하긴 했지만, 반대로 그렇게 길지 않은 연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건 지금 내 정신이 오락가락하기 때문인가? 이 글의 주제가 뭔지도 모르겠다. 나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가? 연휴 동안 다녔던 장소에 대해서 말하고 싶은 건가, 아니면 조카들에 대해서 말하고 싶은 것인가? 내가 하는 말을 내가 알지 못한다. 하지만 꼭 주제라는 것이 있어야만 하는 것인가? 반드시 한 가지 이야기만을 해야 하느냔 말이다. 아, 이건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에 나오는 홀든 콜필드 같은 어투다. 나는 홀든처럼 그렇게 어리지도 않은데! 의식의 몽롱함. 불쾌한 잠이 지속되는 기분. 무언가 짓눌린 느낌. 어쩌면 이게 연휴의 휴유증일지도 모르겠다. 어서어서 정신을 차리고 싶은데, 어쩐지 아플 것 같은 예감 때문에 우울해진다. 아, 이러면 안되는데.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이렇게 힘들 줄 몰랐다. 벌써부터 지겹다는 생각이 든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어쩔 수 없이 또 시간에 맡겨야만 하는 것일까? 이 무섭고도 잔인한 시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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